[D+577] 헌책이 품은 물건

[D+577] 헌책은 모두 나름의 사연을 품고 있습니다. 헌책방까지 흘러오게된 사연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죠. 하지만 가끔 어떤 책들은 소유했던 분들의 독서 습관이나 성품을 유추하거나 짐작해볼 수 있는 실마리나 증거(?)들을 찾기도 합니다. 밑줄, 그림, 낙서, 메모, 그리고 책 속에 있던 갖가지 물건들이 그런 역할을 합니다.

책이 품고 있던 물건은 따로 상자에 넣어 보관합니다. 주로 많이 나오는 것들이 책갈피입니다. 월급명세서나 엽서가 나올 때도 있고, 영수증이나 서류가 들어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1996년 보사부에서 발행한 국제공인예방접종증명서가 나온 적도 있습니다. 통일염원 44년(1988년) 한백교회에서 만든 예배 인쇄물도 있구요. 비상금으로 끼워둔 돈을 발견할 때도 있습니다. 딱 한 번 5천 원을 찾았었죠. 헌책방 책방지기만이 경험할 수 있는 행복이랄까요.

오늘은 에른스트 피셔의 <예술이란 무엇인가>(돌베개)를 들춰 읽다 메모를 발견했습니다. 또박또박 쓴 글씨로 예술에 관한 책과 저작 목록을 썼습니다. 철필로 써서 스텐실로 찍은 목록입니다. 복사기가 없었던, 귀했던 시절에는 스텐실 등사기를 많이 사용했었습니다.

아마 이 책을 가지고 있었던 분은 미술을 전공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특히 민족미술, 민중미술에 관심이 컸구요. <예술이란 무엇인가>는 1984년 초판이 나왔는데 그 시절 예술 이론을 공부하던 분들이 읽던 책이 무엇이었을까 유추할 수 있는 자료로 손색이 없습니다. 아마 대학이나 대학원 수업을 위해 만든 목록일 수도 있고, 공부 모임에서 세미나를 위해 읽을 책을 정했던 것일 수도 있겠지요.

<예술이란 무엇인가>는 처음에 김성기 님의 번역으로 나왔지만 나중에(1993년) 한철희 님의 번역으로 새로이 출간되었습니다. 검색해보니 새 책은 더는 나오지 않아 헌책으로밖에 구할 수가 없군요. 이 목록에 나오는 책들 가운데 찾아보기 힘든 책들이 여럿 있습니다.

6번 <예술철학>의 저자는 조요한 님인데 저자 이름을 틀리게 썼습니다. 이 책은 1973년 초판이 발행되었고 미학 예술학을 공부하던 이의 필독서로 꼽히던 책입니다. 아르놀트 하우저의 저서들은 창비에서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시리즈로 묶여 나왔습니다. 아마 3, 4, 5번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의 일부만 따로 떼어 엮었던 것이 아닐까 짐작해봅니다.

12번 <시대 정신 I, II, III>는 일과놀이에서 펴낸 무크지입니다. 1984년 출간된 첫 번째 권에 대한 정보는 전혀 찾을 수가 없는데, 두 번째 권(1985년)의 부제는 '해방의 미학, 판화, 사진, 만화', 세 번째 권(1986년)은 '우리 시대의 성, 인간해방과 미술변혁의 논리'입니다.

<시대정신>은 1987년 5월 판금도서 목록에 올랐습니다. 한길사 대표 김언호 님은 자신의 일기에 당시 '판금도서목록'을 기록했는데, <시대정신>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결국 3권을 끝으로 책을 펴내지 못했으리라 생각합니다. 당시로선 꽤 파격적인 내용을 담은 '무크'지였으니 권력을 쥔 자들에겐 눈엣가시 같은 책이었지 않았을까요.(<시대정신>은 어떻게든 구해서 읽어봐야겠습니다.)

두 번째 권에는 만화가 신기활 님의 <핵충이 나타났다> 첫 회가 실렸으니 만화사 자료로도 의미있는 책이라 생각합니다. <핵충이 나타났다>는 지난 2013년 길찾기에서 새로이 나왔습니다. 1989년 도서출판 친구에서 펴냈던 초판본은 비싼 값에 팔립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이 작품은 새롭게 주목을 받았습니다.

<시대정신> 출간년도를 따져보면 이 도서 목록은 1986년 이후 작성된 것이라 봐야겠군요. 30년 전 도서목록을 보며 이리저리 정보를 찾고 책 공부를 하다보니 시간이 훌쩍 갑니다. 서지書誌의 세계는 넓고도 깊습니다. 영원히 끝낼 수 없는 숙제를 하는 기분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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