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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은 드라마&nbsp; < 비브리아 고서당의 사건 수첩 > 의 한 장면 .

 

부산영재교육원에서 내는 잡지 청탁을 받아 썼던 글이다. 청탁받거나 취재해서 쓰는 원고들은 마감이 끝나면 대부분 이리저리 흩어버리고 남는 것이 별로 없다. 독서에 대한 마음도 세월이 지나면서 조금씩 부드러워지거나 굳어지며 변하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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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을 견디는 책읽기를 위해>

 

1. 인생에 정답이 있을 리가!

 

얼마 전 중간고사를 앞둔 아이가 국어 참고서를 펴놓고 공부를 하던 중에 이렇게 이야길 하더군요.

 

아이 : 시는 너무 이해하기 어려워.
나 : 시는 머리로 이해하는 게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는 거지.
아이 : 아빠, 가슴으로 느끼다가 나 빵점 맞아도 좋아?
: 하하하!

 

아이의 말을 듣고 웃고 말았지만, 시를 두고 문제풀이를 한다는 건 예나 지금이나 이해하기가 어렵더군요. 설명글이나 주장글이야 그리할 수 있겠지만 시를 두고 객관식 문제의 정답을 찾는다는 건 시인과 아이들의 감성을 문제 출제자의 의도 안에 가두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학교 교육에 대해 반대하지 않지만 모든 일에 정답이 있다는 듯 선을 긋는 제도교육의 관행은 바뀔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대부분의 아이들이 즐겁게 학교 생활을 하지 못하는 큰 이유도 아마 거기에 있지 않나 싶습니다.

 

이런 인생을 살아야만 정답이거나 정답에 가깝다라고 학교에서 주입하고 있으니 아이들이 다른 꿈을 꾸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구요. 가끔 아이들 앞에서 서서 강연을 할 때가 있는데 무엇을 좋아하는지 질문하면 대답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의외로 많았습니다.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정답을 강요하고 있기 때문에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말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안타까운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 글을 읽는 선생님과 학부모님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인생은 길이 정해지지 않은 여행과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종종합니다. 처음에는 앞장서서 걷는 길눈이(부모님이나 선생님)의 도움을 받지만 성인이 되면 스스로 자신의 길을 찾아야 하죠. 길눈이의 역할은 단순히 무엇이 올바른 길인지 일일이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길눈이가 없는 수많은 갈림길에서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사고하고 행동할 수 있는 힘을 기를 수 있도록 돕는 데 있습니다.

 

어른이 되어도 인생의 정답이 무엇인가 끊임없이 고민하고 되묻는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군요. 그리고 뜻밖의 황망한 슬픔과 괴로움을 마주하게 될 때 인생에 정답이 없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됩니다. 나이가 들수록 기쁨보다 슬픔, 즐거움보다 괴로움 앞에 설 때가 잦아집니다. 슬픔과 괴로움 앞에서 무너지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걸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2. 독서, 슬픔과 괴로움을 견디는 힘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 이런 문장이 나옵니다.

 

“무사태평으로 보이는 사람도 마음 속 깊은 곳을 두드려보면 어딘가 슬픈 소리가 난다.”

 

정말 그렇습니다. 겉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사람들은 모두 슬픔과 괴로움을 안고 있습니다. 아무리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라도 마찬가지겠죠. 사실 행복은 사회적 성공과는 별개라고 생각합니다. 동네 작은 헌책방을 운영하고 있는 저는 사회적인 기준으로 보면 성공과는 먼 삶이지만 제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한 적은 많지 않습니다. 물론 이런저런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힘든 마음이 일었지만 그렇다고 절망하진 않았습니다.

 

제 삶을 누군가와 비교하지 않았고, 제가 좋아하는 책과 함께 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꽤 괜찮은 삶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직장에 다닐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여유를 누리고 있습니다. 물론 경제적인 여유는 줄었습니다만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도 있으니까요.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이 또 있습니다. 바로 슬픔과 괴로움을 견디는 힘입니다. 슬픔과 괴로움을 견디는 힘을 기르는 가장 좋은 방법이 독서라 생각합니다. 데이비드 헨리 소로우는 <숲 속의 생활>에 이렇게 썼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고 그 생활에 있어서 새로운 계기를 마련했던가. 우리들의 기적을 설명해주고 새로운 기적을 제시해주는 책이 아마도 우리들을 위해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현재 말하고 싶어도 말할 수 없는 것이 어디에선가 말해지고 있는 것을 우리들은 발견하게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우리들의 마음을 흩트리고 괴롭히고 곤혹케 하는 같은 문제가 옛날의 현인들에게도 일어났던 것이다. 그 어느 하나도 예외가 없이 말이다. 그리고 각기의 사람들이 그 역량에 따라 그의 언어, 그의 생활을 갖고 그것에 해답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우리들은 예지와 함께 관대한 정신을 배우게 될 것이다.”

 

하지만 바쁜 일상에서 책을 읽는 일은 꽤나 힘듭니다. 하루 일과를 되돌아보면 책을 가까이 할 수 있는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독서를 위해선 단순한 삶이 필수 조건입니다. 특히 저녁이 있는 삶이 필요하죠. 일하는 낮에 책 읽을 시간을 낸다는 건 무리고 집으로 돌아와 느긋하게 책을 펼 수 있는 시간을 갖는다는 게 요즘엔 정말 어려운 듯합니다. 주변을 돌아봐도 다들 바쁜 사람들뿐이군요.

 

소로우는 윌든 호숫가에 통나무집을 짓고 일과 사색과 독서의 균형 속에서 22개월을 살았습니다. 그 덕분에 위와 같은 결론을 낼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약 그만한 시간과 여유가 있다 해도 요즘엔 텔레비전과 컴퓨터와 스마트폰 때문에 책과 가까이 하기 힘들 수도 있겠지요. 책이 아닌 다른 것으로도 지식을 얻을 수는 있겠지만 삶을 위한 사색과 성찰을 위해선 책을 가까이 할 수밖에 없습니다.

 

3. 책과 함께 하는 행복-시안에서 만난 책방 아저씨

 

책방을 열기 전 7개월쯤 세계의 서점을 둘러보기 위해 배낭여행을 떠난 적이 있습니다. 중국 칭다오에서 시작해 포르투갈 포르투까지 육로로 이동하며 1년 동안 서점을 둘러보겠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실행에 옮기긴 했지만 사정이 생겨 7개월 만에 싱가포르에서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직도 기억에 남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중에서 시안에서 만난 노점헌책방 주인 아저씨는 잊을 수 없습니다. ‘장안의 지가를 올렸다는 옛말을 확인하기 위해 시안의 서원 거리를 찾았었습니다. ‘장안의 지가를 올렸다베스트셀러를 일컫는 옛말입니다.

 

장안은 옛 당나라를 수도, 현재의 시안입니다. 2015년 겨울, 아무도 찾지 않는 가게를 지키며 행복한 얼굴로 책을 읽고 계시더군요. 한참 그 골목에서 언제쯤 손님이 올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30분쯤 그렇게 서성댔을까요. 하지만 저 말고는 그 골목 어귀를 지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주인아저씨는 미동도 하지 않고 자신이 좋아하는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가끔은 무릎을 치기도 하고, 어깨를 들썩이기만 할 뿐 자리를 지키며 페이지를 넘길 뿐이었습니다. 그 광경을 보고 나도 책방을 열면 저런 책방지기가 되어야겠다 마음을 먹었죠. 손님이 없어도 즐거이 책을 읽을 수 있는 그런 책방지기 말입니다.

 

노점헌책방 주인아저씨가 책을 읽는 모습을 보고 독서망양(讀書亡羊)’의 고사가 떠올랐습니다. <장자>번무편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양치기가 책 읽는데 정신이 팔려 양을 잃는다는 고사입니다. 이 고사는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 정작 중요한 것을 소홀히 한다는,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지만 책방지기인 저로선 그 양치기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이제 6년차가 되었지만 그만한 경지에 오르려면 아직 한참이나 멀었습니다. 평생 책방이 지킨다고 해도 그리 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일본 에도시대 학자 나카무라 란린은 독서의 즐거움에 대해 <학산록>에 이렇게 썼습니다.

 

“인생의 즐거움에서 방문을 닫고 책을 읽는 것보다 좋은 것은 없다. 진귀한 책 한 권을 얻어 몰랐던 글자 하나를 알게 되고, 괴이한 일 하나를 만나고, 좋은 구절 하나를 보면 나도 모르게 기뻐서 뛰어오른다. 음악은 듣는 순간을 만족시키고 비단은 눈을 만족시킨다고 하지만 (책을 읽는) 그 즐거움에는 비할 수 없다.”

 

4. 공감과 배려, 독서의 마지막 목적지

 

책을 자신의 나침반으로 삼았다면 마지막 목적지는 타인에 대한 공감과 배려라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책을 통해 지식만 얻었다면 책의 정수 중 일부만 거둔 것입니다. 책만 읽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요. 책에 있는 내용을 의심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도 경계해야 합니다.

 

책방에 있으면 온전히 책에 사로잡힌 분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자신이 읽은 것이 옳다는 강한 믿음, 책에서 얻은 지식을 상대방에게 고집하는 모습을 마주할 때면 독서가 능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된사람이기 위해선 이성과 감성이 조화를 이루고 상대방(특히 약자)에 대해 공감하고 배려하는 자세가 먼저 필요합니다. 다시 이 글의 처음으로 돌아가야겠군요.

 

“인간의 일생은 무수한 슬픔과 고통으로 채색되면서도, 바로 그런 슬픔과 고통에 의해서만 인간은 구원받고 위로받는다는, 삶에 대한 나의 생각과 신념이 자연스럽게 배어 나오는 것 같다. 슬픔 또한 풍요로움이다. 거기에는 자신의 마음을 희생한, 타인에 대한 한없는 배려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결코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꺼지지 않는 성화이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언제나 네가 있었다>에 나오는 후지와라 신야의 글입니다. 그는 젊은 시절 대학을 그만두고 인도로 떠나 삶의 밑바닥까지 경험하곤 <인도기행>을 씁니다. 그는 이후 <동양기행>, <황천의 개>, <아메리카 기행>등 여행에서 얻은 지식과 경험을 보듬어 훌륭한 작품들을 씁니다. <돌아보면 언제나 네가 있었다>는 장년이 된 후지와라 신야가 자신을 스쳐갔던 인연들에 대해 술회한 에세이입니다.

 

“슬픔 또한 풍요로움”이라는 그의 성찰이 크게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이제 글을 맺어야겠습니다. 책은 언제나 정답 없는 인생의 나침반이 될 수 있습니다. 나침반 뿐만 아니라 큰 행복감을 주기도 하죠. 책에서 얻은 지식은 자신의 삶을 성찰하는 불쏘시개로 써야 합니다. 그리고 타인의 슬픔에 공감하는 사람이기 위해 노력하는 디딤돌로 삼아야 합니다. 헌책방을 지키며 그런 독서인을 만날 때마다 즐겁습니다. 그런 즐거움은 힘들지만 책방을 하는 이유기도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