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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문화사에서 나온 1959년판 <무기여 잘 있거라>(박기준 역). 당시 가격은 1,200환.


[D+457] 단기 4292년이면, 서기 1959년입니다. 헤밍웨이가 <무기여 잘 있거라>를 완성한 해가 1929년이니 30년 후에 국내에 번역본에 나온 셈이군요. 자료를 찾아봐도 이 책 이전에 나온 <무기여 잘 있거라> 번역본에 대한 소식을 알 수 없었습니다. 번역자 박기준 님은 1950~1960년대 여러 책을 번역한 것을 옛 신문기사로 알 수는 있는데 정확한 약력을 찾기가 어렵군요. 줄거리에 대해선 따로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무기여 잘 있거라>는 일본 이와나미 문고에서 상하권으로 나뉘어 1957년에 출간되었습니다. 아마 그해 록 허드슨(프레데릭 헨리), 제니퍼 존스(캐서린 바클리)가 주연한 영화가 개봉한 탓이었겠죠. 헤밍웨이가 1954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이후 일본이나 국내에서 주목받았겠지만, 전후 사정이 좋지 않았던 우리와 한국전쟁으로 특수를 누렸던 일본과 단순 비교는 힘들 듯합니다. 혹시나 그 전에 일본에서도 번역되어 나오지 않았을까 책방에 있는 1934년판(소화9년) <고금와카집> 뒤편 이와나미문고 목록을 뒤져보니 없습니다.


해방 이전 '적성국'이었던 미국 소설을 번역해 내긴 힘들었을테고 해방 이후에도 전쟁을 거치면서 출판산업이 자리잡기 어려웠을테니 제 생각엔 동서문화사에서 펴낸 <무기여 잘 있거라>가 국내 최초 번역본이 아닐까 짐작합니다. 동서문화사는 1956년 문을 열었는데 국내 출판사 중에서도 역사가 오랜 편에 속합니다.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출판사는 1886년 창립한 가톨릭출판사입니다.


동서문화사가 펴낸 책 가운데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던 책은 역시 야마오카 소하치의 역사 소설 <대망>입니다. 도쿠카와 이에야스의 삶을 그린 36권짜리 이 책은 1970년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출간 당시 주요 일간지 1면 전면광고를 내보낼 정도였으니까요. 어린 시절 늦은 밤 스탠드를 켜놓고 아버지께서 이 책을 읽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합니다. 달리 읽을거리가 없었던 시절이라 덕분에 저도 일찍 이 책을 읽게 되었죠. 


몇 년 전 일본 책방여행을 하며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태어난 오카자키 성을 방문한 적 있는데 이마가와 가문으로 인질로 가다 오다 노부히데(오다 노부나가의 아버지)에게 납치되는 장면이 절로 떠오르더군요. 어린 시절 읽었던 터라 더 기억에 강하게 남았던 모양입니다. 


동서문화사가 1970~1980년대 상품성이 있는 해외문학작품을 발빠르게 번역 출간하고, 웬만한 출판사에선 쉽게 뛰어들기 힘든 전집류를 많이 펴낼 수 있었던 것은 저작권법이 따로 없었던 시절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출판시장이 어렵고, 저작권과 판권까지 따져야 하는 현재로선 자본력이 있다 해도 쉽게 전집류나 총서류를 펴내기 힘듭니다.


1959년판 <무기여 잘 있거라>는 동무에게서 선물로 받았습니다. 여행을 갔다 비어 있는 동무네 처가에 하룻밤 잤는데 다락에 쌓여있는 박스에서 발견했죠. 1950년대 이전에 나온 책을 만나기란 참 힘듭니다. 책방에 오래된 책이 들어오면 따로 보관을 해둡니다. 값을 정하기도 판매하기도 힘들죠. 세월이 지나 옛책들이 많이 모이면 따로 전시를 해도 좋을 듯합니다. <무기여 잘 있거라> 표지 서체가 단정하군요. 군대에서 매직이나 분필로 쓰던 '차트체'와 비슷합니다. 



1957년 개봉한 영화 <무기여 잘 있거라>, 록 허드슨이 주인공 프레데릭 헨리 역을, 제니퍼 존스가 캐서린 바클리 역을 맡았다. 국내에선 1962년에 개봉했다.



영화에서 헨리가 캐서린에게 데이트를 청하는 장면이 기억나는군요. 책에서 그 내용을 찾았는데 역시 영화 속 이미지가 더 강렬해선지 글로 보니 심심합니다. 옛 표현이라 어색하구요. 그런데 남자의 뺨을 '후려갈기고' 속이 빤히 보이는 말에 마음을 뺏기는 것을 보면... 사랑이란 쉽고도 어렵군요.(이게 써놓고도 무슨 말인지.)


캐서린 : 저도 모르게 손이... 아팠죠?

헨리 : 괜찮아요. 익숙하니까요?

캐서린 : 항상 여자에게 맞나요?

헨리 : 항상은 아니에요?

캐서린 : 맞아도 아무렇지 않아요?

헨리 : 난 정말 괜찮아요. 특히 당신 같은 미인에겐...


'1959년판' 위 장면입니다.


나는 어둠에서 몸을 구펴 여인에게 '키쓰'했다. 그러자 날카롭게 찌르는 것이 화끈 해졌다. 여인이 내 얼굴을 모질게 내려갈긴 것이다. 손이 내 코와 두 눈을 처서 반사적으로 눈에서 눈물이 터저 나왔다. (중략) "당신이 한 행동은 정당합니다." 나는 말했다. "난 아무렇지도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