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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313] 아이들이 연필로 또박또박 정성껏 눌러 쓴 글씨를 좋아합니다. 칸과 칸 사이 줄과 줄 사이 적당한 크기로 비뚤어진 획 없이 한 자 한 자 공들여 눌러 쓴 글씨를 읽는 일은 인쇄된 활자를 읽는 것과는 다른 멋이 있습니다. 손편지나 엽서를 주고 받던 시절의 낭만이 이젠 사라지고 없군요. 드물지만 편지나 메모글을 받아 읽는 일은 즐겁습니다. 답장하는 일도 그렇구요.

어제 책방에 신영복 선생님의 책 <청구회 추억>(돌베개)이 들어왔습니다. 2008년에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출간 20주년을 맞아 나온 책입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초판은 원래 햇빛출판사에서 나왔는데 증보판은 돌베개 출판사에서 출간했습니다. <청구회 추억>까지 놓고 보니 한 세트가 되었군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영인본으로 꾸민 <신영복의 엽서>에서 '청구회 추억'을 읽은 적 있습니다. 낡은 갱지에 볼펜으로 담담하게 자신의 기억을 더듬어갑니다. 이 종이는 "하루 두 장씩 지급되는 재생종이로 된 휴지"였죠. 아래 문장으로 시작하는 '청구회 추억'은 책으로 묶이면서 약간 수정됩니다. 

"1966년 이른 봄철에 서울대학교의 문학회의 초대를 받고 회원 20여 명과 함께 서오능으로 한나즐의 답청놀이에 섞이게 되었다." - <신영복의 엽서>

"1966년 이른 봄철 서울대학교 문학회의 초대를 받고 회원 20여 명과 함께 서오릉으로 한나절의 답청놀이에 섞이게 되었다." - <청구회 추억>

글맛으로는 아래가 낫지만 실제 읽는 맛으론 볼펜으로 마음을 담아 눌러쓴 위 문장이 아름답습니다. 신영복 선생님이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사형 선고를 받고 남한산성 육군교도소에서 쓴 이 글은 이태 전 서오릉에서 만났던 문화동에 사는 여섯 아이들과의 우정을 담았습니다. 

서울대학교, 대학원을 마치고 육군사관학교 교관으로 있던 전도유망한 그와 중학교에 진학하기 힘들 정도로 가난하지만 영혼만은 맑은 아이들의 우정이 한 편의 소설처럼 이어집니다. 

스물일곱 젊은이가 사형이 언제 집행될 지 모르는 상황에서 이렇게 담담하고 단정한 문장과 글씨로 이어갈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습니다. 처음 <신영복의 엽서>를 펼쳐보곤 많은 반성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과 같은 내용을 담았음에도 그 울림이 다른 것은 '육필, 직접 쓴 글씨'가 주는 힘이겠지요.

<신영복의 엽서>를 보고 베껴쓰기를 많이 했었습니다. 그 전에도 베껴쓰기를 좋아했지만, 이 책을 마주하곤 발심해 더 열심히 했었죠. 지금도 손에 놓지 않고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책을 읽다 좋은 문장이 나오면 연필이나 펜을 들고 수첩이나 공책에 옮겨 씁니다. 타고난 졸필인데 계속 쓰다보니 조금씩 글씨가 나아지는 것이 보이더군요. 

"컴퓨터로, 스마트폰으로 쓰면 된다.", "악필이라 흥미가 없다."는 분들을 위해 신영복 선생님의 이야기를 옮깁니다. 옳은 말씀이라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글씨란 타고나는 것이며 필재가 없는 사람은 아무리 노력하여도 명필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정반대의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필재가 있는 사람의 글씨는 대체로 그 재능에 의존하기 때문에 일견 빼어나긴 하되 재능이 도리어 함정이 되어 손끝의 교(巧)를 벗어나기 어려운 데 비하여 필재가 없는 사람의 글씨는 손끝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쓰기 때문에 그 속에 혼신의 힘과 정성이 배어 있어서 '단련의 미'가 쟁쟁히 빛나게 됩니다.

만약 필재가 뛰어난 사람이 그 위에 혼신의 노력으로 꾸준히 쓴다면 이는 흡사 여의봉 휘두르는 손오공처럼 더할나위 없겠지만 이런 경우는 관념적으로나 상정될 수 있을 뿐, 필재가 있는 사람은 역시 오리 새끼 물로 가듯이 손재주에 탐닉하기 마련이라 하겠습니다."

옆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오로지 취업에만 온 정신이 매달려 있는 젊은이들에게 <신영복의 엽서>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할 수 밖에 없는 감옥에서조차 치열하게 시대의 아픔을 고뇌하고 또박또박 글로 옮긴 젊은이가 있었다는 증거니까요. 함께 서승 선생님의 <옥중 19년> 읽어보면 좋겠습니다. 

[사진]은 신영복 선생님이 감옥에서 휴지에 썼던 '청구회 추억' 육필 원고 첫 장입니다. <신영복의 엽서>에서 모두 볼 수 있습니다.




청구회 추억

저자
신영복, 조병은(영역) 지음
출판사
돌베개(주) | 2008-07-30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절망의 끝에서 써내려간 아름답고 슬픈 에세이 신영복 문학의 백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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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의 엽서

저자
신영복 지음
출판사
돌베개 | 2013-08-20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육필 원본을 통해 다시 읽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의 감동신영복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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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저자
신영복 지음
출판사
돌베개 | 2010-09-01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1988년 첫 출간된 이래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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