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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일지

[D+212] 잡지의 구실

sosobooks 2014. 6. 11. 19:53



[D+212] 아마 잡지의 시대가 다시 오진 않겠죠. 고등학교 다닐 무렵 열심히 구독했던 잡지가 바로 <마이컴>과 <PC라인>이었습니다. 월말 잡지가 나올 때쯤이면 목을 빼고 기다렸습니다. 워낙 컴퓨터에 빠져 있던 시절이라 <마이컴>과 <PC라인>을 사보는 것외에도 동네 책방 매대에 서서 다른 컴퓨터 잡지들도 한번 쯤 들춰보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꼬박꼬박 사서 모았던 그 잡지들은 제가 군대 가 있는 동안 시골집 아궁이에서 불쏘시개가 되고 말았죠.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으면 꽤 재밌는 수집품이었을텐데 아쉽습니다.

헌책방을 돌아다니다보면 이제는 나오지 않는 잡지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있는대로 구입할 수 없으니 창간호나 자료로 남겨둘만한 잡지들만 구해서 옵니다. 예를 들면 <씨알의 소리>, <사상계>, <뿌리깊은 나무>, <샘이 깊은 물>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잡지들입니다. 사실 이런 잡지들은 보이는데로 소장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만 비용이 만만치 않아 그러기 힘듭니다. 

현재 책방에 가지고 있는 창간호 잡지는 <뿌리깊은 나무>, <길>, <녹색평론> 등이 있습니다. 예전 일본에 가서 구해온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부가 펴낸 <사진주보>도 몇 권 있고, 정수일 선생이 '무하마드 깐수'로 활동할 수밖에 없었던 시절 글이 실린 <문화론>이란 계간 학술지도 있습니다. 김기찬 선생님의 골목길 풍경이 실린 <사회와 평론>과 5.18광주민주항쟁 당시 촬영한 미보도 사진을 실은 <말>도 있습니다.

몇 년 사이 구독했던 잡지 가운데 기억에 남는 것은 KT&G상상마당에서 발행했던 <브뤼트>였습니다. 참 좋은 잡지였는데 2년 동안 KT&G의 후원을 받은 후 독립했지만 결국 버티지 못했죠. 독립한다는 소식을 듣고 구독신청하고 입금까지 했었는데... 그게 2011년이었습니다. <브뤼트>가 독립하던 당시 <한겨레>에 실린 관련 기사(2011년 6월 8일자)의 제목은 "잡지 멸종시대에 '브뤼트' 도전장'"이었습니다. 도전장을 내밀었지만 결과는 멸종시대에 걸맞는 패배였습니다. 

그 이후엔 <경남도민일보>에서 발행하는 <피플파워>를 2년 동안 구독했군요. 지금 보고 있는 잡지는 노동당 기관지 <미래에서 온 편지>와 <창비> 두 가지입니다. 노동당 당원은 아니지만 <미래에서 온 편지>에서 다루는 사회적 이슈들은 깊이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창비>는 계간지다 보니 잊을만 하면 옵니다. 둘 다 책방에 비치해두고 있으니 책방에 와서 읽으셔도 됩니다.

제가 잠시 일했던 월간 사진잡지 <포토넷>도 펴내지 않은 지 꽤 시간이 지났습니다. 정기구독자와 광고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제작비가 많이 드는 잡지는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군부독재시절에는 언론통제 때문에 사라진 잡지가 많았다면 현재는 온라인과 방송의 영향력 때문에 많은 잡지들이 기로에 서있거나 이미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2013년 잡지산업실태조사에 따르면 현재 잡지사 30.1%가 "미디어 환경의 변화와 독자 감소" 때문에 종이 잡지가 아닌 온라인 잡지 발행을 고려하고 있다고 합니다. 예전, 잡지에서 얻던 '최신' 정보를 이젠 대부분 인터넷으로 찾아볼 수 있기 때문에 종이 잡지가 생존할 수 있는 시대는 이미 저물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최근 잡지 시장에서 가장 주목받는 잡지는 <매거진 B>가 아닐까요. 광고를 전혀 싣지 않는 <B>는 매 호마다 단 하나의 브랜드를 취재하고 일반 독자가 알기 힘든 뒷이야기까지 알려줍니다. 유행에 앞서 신뢰할 수 있는 브랜드의 정보를 알려주니 원래 잡지의 기능에도 충실합니다. 책읽는 독자의 눈높이가 아닌 브랜드에 열광하는 소비자의 눈높이에 맞춘 것이 성공 포인트가 아니었을까요. <매거진B>는 단순한 잡지라기 보다는 잡지와 단행본의 장점을 잘 살린 무크지에 가깝습니다. 제가 가진 <매거진B>는 '펭귄북스'와 '레고' 두 권입니다.

글이 길어졌군요. 일천구백칠십륙년 삼월 <뿌리깊은 나무> 창간호[사진]에 실린 한창기 선생님의 창간사 가운데 일부입니다. 잡지의 시대는 저물었지만 '좋은 잡지'의 역할은 저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겠지요.

"<뿌리깊은 나무>는 이 나라의 자연과 생태와 대중문화를 가까이 살피려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이웃 나라의 멍에를 벗고 서른 해를 보내는 동안에, 남녘과 북녘의 분단 속에서나마 눈부신 학문의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이 학문의 업적이 잘 삭여져서 토박이 민중의 피와 살이 되지는 못했던 듯합니다. 이것은 교육이 질보다는 양에 기울어졌기 때문이며 '생각하는' 공부보다는 '외우는' 공부에 치우쳤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뿌리깊은 나무>는 이 땅의 교육이 '생각하는' 공부를 시키는 일을 힘껏 거들고 학문과 토박이 민중과의 사이에 있는 틈을 좁히도록 힘쓰겠읍니다. (중략)

이러한 포부들이 한꺼번에 다 이루어질 수는 없는 줄로 압니다. 잡지의 편집은 아마도 영원한 시행 착오일 수도 있음을 이 <뿌리깊은 나무>에 대를 물리고 떠나는 <배움나무>를 펴내면서 배웠습니다.

이러한 잡지의 구실은 작으나마 창조이겠읍니다. 창조는 역사의 물줄기에 휘말려들지 않고 도랑을 파기도 하고 보를 막기도 해서 그 흐름에 조금이라도 새로움을 주는 일이겠읍니다. <뿌리깊은 나무>는 그 이름대로 오래디 오랜 전통에 깊이 뿌리를 내리면서도 바로 이런 새로움의 가지를 뻗는 잡지가 되고자 합니다."



특집 한창기

저자
강운구와 쉰여덟 사람 지음
출판사
창비 | 2008-01-20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잡지 뿌리깊은나무 샘이깊은물의 발행인이자 편집자였으며, 한국브리...
가격비교



책 바보 한창기 우리 문화의 뿌리깊은 나무가 되다

저자
김윤정 지음
출판사
청어람미디어 | 2012-05-21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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