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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380] 책방을 하고 있지만 팔 수 없는 책들이 있습니다. 소중하지만, 흠이 많아 내놔봐야 좋은 값을 받긴 어렵고, 다시 구하기는 힘든... 그런 책들입니다. 그중에 몇 권의 시집도 있는데 신경림 선생님의 시집 <농무>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창비시선 첫 번째 시집인 <농무>는 워낙 많이 팔린 터라 헌책 구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제가 가진 책도 초판(1975년 3월 5일)이 아니라 1979년에 나온 7판입니다. 군데군데 얼룩도 있고 색이 바랬지만 곁에 두고 있습니다. 

이 책을 아끼는 이유는 뒤 표제지에 황동규 선생님의 시 '즐거운 편지'가 옛 주인의 손글씨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사진] '즐거운 편지'는 그가 고등학교 시절, 그러니까 1958년 <현대문학>에 발표한 시입니다. 만년필로 '소심하게' 날려 쓴 시가 정겹더군요. <농무>의 주인은 시를 진심으로 좋아했던 분이었나 봅니다. 실명을 남기지 않아 아쉽습니다.

가끔 책에 다른 이의 글이나 자신의 날적이 남긴 것을 보면 갈무리를 해둡니다. 이런 흔적이 남은 책은 값을 매기기가 어렵습니다. 누군가에겐 흠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작은 흔적도 책의 이력을 알려주는 소중한 자료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농무>를 꺼낸 이유는 지난밤 꾸었던 꿈과 비슷한 감정을 느꼈던 시가 떠오르지 않아서였습니다. 제목이 생각날 듯 말 듯, 분명 꿈속에서 본 것과 그 시가 너무나 흡사했습니다. 책의 제목, 문장, 지은이가 정확하게 떠오르지 않고 계속 머릿속에서 맴돌 때의 고통(?)을 즐기는 편인데 날이 갈수록 까먹는 증상이 심해지는군요.

제가 꾼 꿈에 대한 묘사입니다. 꿈이 없는 편인데 어린 시절 기억의 파편들이 감기약 탓에 발현했나 봅니다. 
.....

약 기운 때문인 듯했다. 꿈을 꾸었다.

잎이 다 떨어진 담쟁이가 그물처럼 엉겨붙은 낡은 보루쿠 축사 앞에서 늙은 소의 뿔을 잡고 나는 서 있었다. 축사에 더 이상 소는 없었다. 노간주나무로 만든 코뚜레 몇 개와 녹슨 쟁기와 날 빠진 조선낫, 겨울을 나기 위해 쟁여둔 장작 두어 지게만 남았다.

늙은 소의 뿔은 얼어 터진 내 손등만큼이나 까칠했지만 따뜻했다. 동구 밖에서 트럭이 천천히 마을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내가 이랴, 가자 하자 소는 길게 딱 한 번 울었다. 소 울음이 뒷산으로 메아리쳤다. 스스스 숲의 대나무들이 몸을 비비며 소 울음을 먹었다. 동청 마당에서 트럭이 빵하고 클랙슨을 울렸다.

늙은 소는 눈물을 흘렸다. 나는 손등으로 콧물을 훔쳤다. 얼굴없는 소 장수가 트럭 뒷문을 열었다. 거기엔 우리 집에서 팔려간 소들과 가족들과 마을 사람들과 가내끝에 존재하던 모든 살붙이들이 타고 있었다. 소 장수가 때묻은 줌치에서 빳빳한 돈뭉치를 건넸다.

나는 소뿔을 어루만졌다. 소 장수는 재촉했지만 나는 소울음이 사라진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걸었다. 하지만 소 장수의 트럭은 멀어지지도 않았고 가까워지지도 않았다. 거기서 꿈을 깼다.
.....

<농무>에서 찾은 시 '서울로 가는 길'입니다. 아마 첫 문장이 제 기억 구석진 곳에 남아 있었나 봅니다.
.....

허물어진 외양간에
그의 탄식이 스며 있다
힘 없는 뉘우침이

부서진 장독대에
그의 아내의 눈물이
고여 있다 가난과
저주의 넋두리가

부러진 고욤나무 썩어 
문드러진 마루에
그의 아이들의 
목소리가 배어 있다
절망과 분노의 맹세가

꽃바람이 불면 늙은
수유나무가 운다

우리의 피가 얼룩진
서울로 가는 길을
굽어 보며

* 내일은 개인 사정으로 책방 쉽니다.



농무

저자
신경림 지음
출판사
창비(창작과비평사) | 2000-04-30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70년대 한국 시단과 독서계에 `농무`만큼 큰 충격과 감동을 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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