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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일지

[D+392] 까뮈와 고래와 눈물

sosobooks 2014. 12. 8. 23:00




[D+392] 1년 전 이맘 때쯤 글쓰기 모임을 만들었습니다. 모임 이름은 '손바닥에 쓰다', 짧은 소설을 쓰는 모임인데 그동안 썼던 작품으로 소설집을 만듭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집 <손바닥 소설>을 읽고 시작했었죠. 


선생님을 모시지 않고 스스로 이야기를 쓰고 낭독하고 아이디어를 나누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물론 창작에는 항상 '고통'이 따르니 2주에 한 번씩 모임날이 가까워 오면 압박(?)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요 며칠 그동안 함께 모임을 했던 분들의 원고를 모으고 다시 읽느라 꽤 바빴습니다. 조만간 책으로 만들고 조촐하게 낭독회를 할 생각입니다. 모두 32편의 손바닥 소설이 실립니다. 낭독회와 책 판매글은 조만간 공지하겠습니다. 


아래는 제가 쓴 손바닥 소설 중 한 편입니다. '무릉서점'이라는 상상 속의 책방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입니다. 책방과 책 이야기를 써보고 싶었습니다. '무릉서점'을 배경으론 모두 6편을 썼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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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뮈와 고래와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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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부러진 선풍기가 고개를 돌리며 끼익~하고 비명을 질렀다. 바닥을 바라보고 미지근한 바람을 내뱉는 선풍기는 무릎 아래쪽 더위만 날렸다. 바로 세우면 10초를 견디지 못하고 내 머리 무겁소, 고개를 떨궜다. 고장 난 선풍기 아직도 쓰느냐 타박하는 손님들도 있었지만 고개만 부러졌을 뿐이라고, 책방 선풍기라 책 읽느라 고개를 숙이고 있는 거라 농 아닌 농을 건넸다. 


짙은 초록색 선풍기는 누군가 책방 앞에 버린 것이었다. 겉이 멀쩡해 보여 혹시나 하고 가져왔는데 팬은 돌았지만 고개를 들지 못하는 중병을 앓았다. 그래도 좋았다. 헌책방이야 낡고 병든 것도 언제든 한자리 낄 수 있는 곳이니까. 


한낮 열기는 뜨거웠고, 거리는 한산했다. 도로 위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게 선명하게 보였다. 더위와 휴가철이 겹치는 8월 주말에 책방에 웅크리고 앉아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땀이 엉덩이께로 떨어지는 것을 규칙적으로 세는 일은 곤욕이었다. 라디오에선 태풍이 제주도 남쪽 해상으로 북상 중이라고 했지만 '느리게 북상 중'이라는 태풍이 비바람을 몰고 오려면 하루는 더 견뎌야 했다. 


눅눅한 더위를 견디는 것보다 아예 비바람이 칠 때가 더 좋았다. 더위에 시달리나 비바람이 몰아치나 휴가철에 손님이 없기는 마찬가지지만 적어도 엉덩이 땀띠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까. 어쨌거나 아무래도 괜찮았다. 책상 위엔 읽을 책들과 가격표를 붙여야할 책들이 수북했다. 바닥에 떨어진 연필을 주워 들고 톡톡 책 표지를 두드리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에 장단을 맞췄다.


"간다고 하지 마오, 간다고 하지 마오, 날 두고 간다면, 내 마음은 아프다오."


김정미의 옛 노래였다. 김정미는 오래전 잊힌 가수였다. 책방에 왔던 그녀는 꼬리가 긴 깊고 매력적인 눈으로 책방을 살폈다. 목소리는 '김정미의 허스키'와 비슷했다. 


그녀가 두고 간 책들은 모두 까뮈의 것이었다. <카뮈-그르니에 서한집>, <이방인>, <반항하는 인간>, <페스트>, <결혼, 여름>, <칼리쿨라의 오해>, <여행일기>, 그리고 <시시포스의 신화>아니 <시지프의 신화>. 맨 위에 올라와 있는 책은 오래 전 나온 범우사에서 나온 문고판이었다. 


영원히 돌을 굴려 산 위로 올려야할 운명을 가진 주인공 이름으론 시시포스보다 시지프가 나았다. 스, 시옷은 새고, 프, 피읖은 매듭짓는 느낌이다. 옷깃을 세우고 반쯤 벌린 입으로 담배를 물고 비스듬히 앞을 쏘아보는 까뮈의 사진이 <시지프의 신화>를 빼곤 모든 책의 표지에 판박이처럼 들어가 있었다. 그래서 더욱 맨송맨송한 표지를 가진 <시지프의 신화>가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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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에 전화를 하는 손님은 두 부류다. 책을 구하거나 팔거나. 열에 아홉, 구하는 전화는 참고서나 수험서, 전공책을 찾는다. 책을 내놓겠다는 전화는 어린이 전집류가 대부분이다. 욕심을 내어 아이들을 위해 큰 돈 들여 샀다 자리만 지키고 있었던 전집. 이사할 때 정리 1순위가 전집이었다. 그녀가 책을 팔고 싶다고 했을 때,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어린이 전집은 매입할 수 없습니다"라고 했던 것은 실수였다. 여느 젊은 엄마들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애들 책이 아니고 까뮈 책들이에요."


그리곤 차례대로 제목을 불렀다. 까뮈의 책 따윌 찾는 사람은 오랫동안 없을 것이란 사실을 알면서도 '까뮈를 사랑하는' 그녀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그녀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사겠습니다. 하지만 원하시는 값을 쳐드리긴…."

"괜찮아요. 일찍 알았으면 다른 책들도 넘겼을 텐데 집에 남은 마지막 책들이라 빨리 없애고 싶어서."


내 말을 끊는 그녀의 목소리가 묘하게 서늘했다. '없애고 싶어서'에 납추가 달려있는 듯했다. 전화를 끊고, 그녀는 하루 뒤 점심때가 되어서 나타났다. 어제였다. 가슴이 깊게 파이고 몸매가 드러난 아이보리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고래를 타고 있는 소녀가 그려진 커다란 에코백에서 책을 꺼냈다. 


몸을 숙이자 가슴골에서 은색 십자가 펜던트가 반짝였다. 나이를 짐작할 수 없었다. 몸짓과 말씨는 농염한 40대가 분명했으나 외모는 30대 초반, 아니 20대 후반으로 보였다. 가늠할 수도 없었고, 모든 것이 이질적이었다. 자신이 걸치고 있는 몸뚱이의 매혹을 스스로 알고 있는 여자는 자신이 상처 입거나 상대방에게 치명상을 입힌다. 어느 쪽으로든 아픔과 불행을 끌고 다니는. 내가 보기에 분명 그녀는 후자에 가까웠다.


"날씨가 정말 덥군요."


그녀에게서 시선을 뗐다. 목 부러진 선풍기를 그녀 쪽으로 돌렸다. 그녀는 알 듯 모를 듯 미소를 짓곤 에코백에서 마지막으로 붉은 클러치를 꺼냈다.


"이 에코백은 덤으로 드릴게요. 딸 아이 건데 이제 멀리 떠나서, 책이랑 가방이 마지막이네요. 책값은 얼만가요."


서랍에서 돈을 꺼내 그녀에게 건네자 입꼬리가 올라갔다. 나긋한 발걸음으로 책방을 나섰다. 문 앞에서 그녀가 잠깐 뒤돌아보았을 때 십자가 펜던트가 반짝 빛났다. 그녀가 떠나고 에코백을 옷걸이 걸었다. 고래 밑에 작게 이름이 있었다. 강수민.


**

김정미의 노래가 끝났다. <시지프의 신화>를 펼쳤다. 주루룩 책장을 넘기다 멈췄다. 연하게 마음에 드는 문장에 밑줄을 그어두었다. 낡은 종이 위에 흑연이 사라지고 있었다. 원래 책이 만들어질 때부터 그어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죽음과 삶이 교차하는 문장이 그녀의 딸, 수민은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나는 죽음이 또 다른 삶으로 인도한다고 믿고 싶지는 않다. 그것은 닫히면 그만인 문이다."


책장을 계속 넘겼다. 책의 마지막, 광고가 있는 페이지에 작은 글씨들이 보였다. 쪽 가장자리에 가녀린 글씨로 빼곡하게 채웠다. 힘없는 필체였다.


"당신이 엄마에게서 아빠를 뺏었을 때, 엄마가 남긴 십자가를 뺏었을 때, 나는 이미 죽었다. 하지만 스스로 사라지진 않을 거야. 장님이 되어 사라진 아빠, 가눌 수 없는 다리, 발가벗겨진 야윈 몸. 남은 것은 까뮈와 고래와 눈물."


똑같은 문장을 가장자리 여백에 반복해서 썼다. 수민의 글이 알폰스 무하의 덩굴풀 그림처럼 느껴졌다. 다른 책들을 살폈다. 깨끗했다. 그녀가 붉은 클러치에 책값으로 치른 돈을 넣을 때 얼핏 사진을 본 기억이 났다. 환하게 웃고 있는 그녀와 남편이라고 하기엔 젊은 남자. 완벽한 커플처럼 보였다. 


사진 속에 고래를 타고 있는 소녀는 없었다. 그녀는 분명 딸이 멀리 떠.났.다.고 했었다. 수민은 어디로 떠난 것일까. 열기가 가라앉은 창밖으로 땅거미가 지고 어둠이 찾아오고 있었다. 책상 위에 그녀가 두고 간 담배를 문 여섯 명의 똑같은 까뮈가 날 쏘아보고 있었다. 구역질이 났다.



시지프의 신화

저자
카뮈 지음
출판사
범우사 | 1996-09-20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이 신화가 비극적이라면 그것은 시지프라는 영웅이 의식적인 인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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