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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일지

[D+395] 연필 깎기의 정석

sosobooks 2014. 12. 11. 23:39


[D+395] 아이들에게 책을 억지로 읽히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하지만 책을 좋아하게 만들 수는 없을까 고민합니다. 책을 가까이 하기 힘든 가장 큰 이유는 학교 공부와 스마트폰인 듯합니다. 책 읽을 시간 내기가 힘들고, 책보다 스마트폰이 더 가까이 있기 때문이겠죠. 스마트폰이나 태블릿PC가 책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겠지만, 종이를 넘기며 읽는 즐거움을 줄 수는 없습니다. 


책 읽는 행위는, 오감을 자극합니다. 손끝에 전하는 매끄러운 종이의 감촉, 비점막에 확산하는 기름 섞인 잉크 냄새, 망막에 맺히는 날렵한 글꼴의 형상, 달팽이관에 내려앉는 부드럽게 책장을 넘기는 소리, 그리고 살짝 침을 묻혀 책장을 넘길 때 혀끝 미뢰에 감도는 미묘한 책의 맛(?)까지... 특히 좋은 책을 손에 들었을 때는 세포들이 더 강하게 반응합니다.


아이들이 책 읽는 즐거움을 깨닫길 바라며, 입맛(?)에 맞을만한 책이 있으면 집에 가져와 은근슬쩍 아이들 주변에 놓아둡니다. "읽어보라"고 하지 않고, "이 책 재밌을 것 같지?"로 대신하죠. 하지만 대부분 실패하기 마련인데 가장 최근 큰 아이(중1)가 "아껴서 읽어야겠다"고 할 정도로 성공을 거둔 책이 있습니다. (시험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아예 학교에서도 읽겠다고 챙겨가더군요.


'최고의 HB 연필 깎기 장인' 데이비드 리스가 지은 <연필 깎기의 정석>(propaganda)입니다. 이 책


을 읽곤 매우 사소한 일도 즐겁게 집중하고 파고 들면 경지에 이를 수가 있구나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기록하고 정리하면 이렇게 '아이들도 좋아할 수 있는' 재밌는 책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죠. 지금껏 수많은 연필을 깎았지만 '연필 깎기'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본 적은 없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소하고, 일상적인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죠.


아마 아이가 이 책을 매우 재밌게 읽은 이유는 자신도 현재 경험하고 있는 사소하고 일상적인 일(연필 깎기)를 엉뚱하지만 재밌게 풀어냈기 때문일 겁니다. 이 책의 저자 데이비드 리스는 '연필 깎기 장인'인 동시에 만화가입니다. 만화 밑그림을 그리면서 연필 깎기 장인으로 거듭나지 않았을까요. 그는 '연필 목베기' 장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연필 촉이 망가진 경우엔 새로운 연필 촉을 위해 '과감하게' 잘라야 할 때도 있습니다.


"연필의 몸통을 칼로 베고 촉을 제거하는 것은 가슴 쓰라린 경험이 될 수 있다. 그렇지만 연필을 깎아야 하는 우리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완벽한 촉을 마들고 지켜야 한다고 배웠다. 그러니 이 같은 절단이 매몰차고 부당한 행위로 느껴지더라도 어쩔 수 없다.


이 절차를 치르고 나서 상실감이나 자괴감이 든다면 잠시 이마의 땀을 닦고 엘리너 와일리의 '나의 영혼에 부치는 시'에 나오는 시구를 암송하며 침착을 되찾도록 하라."


꾸밈없는 담흑빛의 

순수하고 완전한 형태가

숙명의 포물선을 그리며

폭풍우 속에서 균형을 잡네


그에게 연필을 맡긴 고객들이 남긴 찬사 중 가장 재밌는 걸로 골랐습니다. 엉뚱해서 좋군요.


"장인의 혼이 담긴 연필을 보고 진짜 기절초풍했어요! 그런데 질문있는데요, 아저씨가 제일 좋아하는 열대 과일은 뭐예요?" - 나일라(초등학교 3학년생)


연필은 값싼 필기구입니다. 제가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다닐 무렵엔 몽당연필까지 아껴 썼고, 운동회 때 연필 한 다스 상품으로 받기 위해선 이를 악물고 뛰어야 했습니다. 요즘엔 아이들 학습지 홍보용품으로 무료로 몇 자루씩 나눠주기도 합니다. 아이들도 연필을 그리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더군요. 


하지만 연필은 책으로 만들어지는 모든 창작물의 모체입니다. 폴 오스터는 <왜 쓰는가>(열린책들)에서 어린 시절 자신이 좋아하는 야구선수를 만났던 이야기를 썼습니다. 사인을 받으려는데 자신도 주변 사람도 아무도 펜(연필조차)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경험 때문에 항상 연필을 가지고 다니기 시작했고, 연필이 있어서 자연스레 글을 쓰게 되었고, 그래서 작가가 되었다고 했죠.


오래 전 소설가 김훈 선생님이 <한겨레 신문> 취재기자로 일할 때 성공회 서울성당에서 가까이 뵌 적있습니다. 기자회견이 있었는데 취재 수첩에 몽당연필로 꼼꼼하게 기록하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그는 산문집 <밥벌이의 지겨움>(생각의 나무)에서 "연필로 쓰면 내 몸이 문자를 밀고 나가는 느낌이 든다"고 했습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연필은 지우개가 달린 스태들러 134-HB '옐로우 펜슬'입니다. 연필 깎을 때 주로 삼각형 모양의 샤파 연필깎기를 씁니다. 가끔은 칼로 깎을 때도 있는데 여러 해 계속 사용하고 있는 것이 NT CUTTER PRO-A 커터칼입니다. 심을 다듬을 땐 DG 모델을 쓰기도 합니다.


뾰족하게 심을 다듬은 연필을 쥐면 뭐든 쓰고 싶고 그리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저도 베껴쓰기를 하거나 메모를 할 때 연필을 자주 사용합니다. 책상 위에 연필만 모아둔 연필접시가 항상 놓여 있습니다. <연필 깎기의 정석>은 나에게도 아이에게도 매우 유익하고 재밌는 책이었습니다. 


그런데 저자는 이 책의 영감을 어디서 얻었을까요. 바로 '헌책방'입니다. 뭔가 노골적인 광고 같군요.


"이 작은 책을 쓰는 데 영감을 준 것은 수년 전 한 헌책방에서 발견한 선박 설비 입문서다. 1940년 출간된 그 책은 강철 선박의 조립과 수리 기술을 배우는 사람들을 위한 안내서였다.(안내서의 제목은 <오델스 선박 설비 입문:실무 사진과 함께 보는 현도공, 용접공, 리벳공, 앵글 단조공, 플랜지 제조공, 기타 모든 선박 기계공을 위한 강선 조립 및 수리의 실제>이다. 저자는 랠프 뉴스테드)


책의 첫머리에는 지어지고 있는 배의 관점에서 쓴 롱펠로의 시 '선박의 건조'의 한 구절이 인용되어 있다. 나는 이 시구가 희망의 선언이자 장인 정신의 찬미라고 이해했다. 그리고 마지막에도 같은 구절이 나온다."


나를 올곧게 지어주오, 오 솜씨 좋은 명인이여.

튼튼하고 강한 배를 지어주오.

온갖 재난이 닥쳐도 끄떡없고

모진 풍파를 만나도 당당히 맞서 싸울,

그런 훌륭한 배를 지어주오.



연필깎기의 정석

저자
데이비드 리스 지음
출판사
프로파간다 | 2013-07-01 출간
카테고리
예술/대중문화
책소개
문필가, 예술가, 건축가, 디자이너, 목수, 기술자, 공무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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