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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일지

[D+441] 필사의 즐거움

sosobooks 2015. 1. 26. 22:54




[D+441] 좋은 문장이 있으면 공책에 옮겨 쓰기 좋아합니다. 필사는 독서의 방법 중에서도 가장 더디지만 그만한 매력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속독에 대한 욕심이 있었는데 언제부턴가 많은 책을 빠르게 읽는 것보다 마음에 와닿는 책 한 권을 정성들여 느리게 읽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가끔 필사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전문가는 아니지만 제가 주로 사용하는 도구(?)를 소개합니다. 가장 즐겨쓰는 펜은 라미 사파리 만년필(EF닙), 잉크는 푸른색을 좋아합니다. 노트는 엔젤 스토리 트래블 무선 노트를 주로 사용합니다. 라미 사파리 만년필은 4만원대, 엔젤 스토리 노트는 권당 1,000원 정도면 인터넷에서 구입할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값비싼 만년필과 노트를 구입할 필요는 없습니다.(나중에도 마찬가지) 엔젤스토리 노트는 A5보다 크기가 작고 48쪽인데, 만년필로 써도 비침이 없습니다. 그리고 시집에 끼워두었다가 간편하게 시를 필사하기 좋습니다. 처음부터 긴 글을 필사하기 보다 평소 좋아하는 시를 옮겨쓰며 조금씩 필사의 재미를 알아가면 좋을 듯싶습니다.

만년필과 노트 두 가지도 귀찮다 싶으면 연필과 일반 공책으로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연필을 구입하실 땐 2H 정도 심이 단단한 것을 구입하는게 좋습니다. 연심의 경우 열심히 쓸수록 금방 심이 닳고 같은 굵기로 쓰기가 힘드니까요.

따로 목표를 정해두고 필사를 하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여유가 있을 때 조금씩 해보면 마음도 차분해지고 문장의 깊은 맛을 느끼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 많은 돈이 드는 것도 아니구요. 마음이 내키면 자신의 글을 쓸 수도 있겠지요.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에는 필사사의 도구에 대한 묘사가 나옵니다. 필사를 위해 정말 다양한 도구들이 당시에는 필요했습니다. 인쇄술이 발명되기 전엔 필사만이 책을 만드는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유럽은 쿠텐베르크가 1495년 인쇄술을 발명하기 전까지(<장미의 이름> 시대 배경은 1327년) 수도원이나 교회에 소속된 필사사가 그 일을 대신했죠. 

"뿔로 만든 잉크병, 수도사들이 예리한 칼날로 끊임없이 다듬어다 준 우필, 양피지를 펴는데 필요한 부석, 줄을 긋는 데 필요한 자에 이르기까지, 준비에 빈틈이 없어 보였다. 각 필사사들 옆, 경사진 서안書案 위에는 독경대도 있었다. 필사사들은 필사할 고문서를 이 독경대에다 올려 놓은 다음, 적당한 크기로 잘라낸 유리를 그 위에다 대고 한 면씩 필사해 나갔다."

필사사의 고통에 대한 묘사도 있습니다. 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을 위해 하는 것이니 이런 고통까지 짊어질 필요는 없겠지요. 하하.

"오랫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하는 학승, 필사사, 주서사들에게 추위는 여간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다. 추우면 우필을 쥔 손가락이 마비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평상 기온 아래서라도 6시간 정도 계속해서 쓰고 있으면 손가락에 경련이 이는데, 특히 엄지손가락은 누구의 발에 밟히기라도 한 것처럼 얼얼해지는 법이다.

옛 필사본의 여백에서 볼 수 있는, '하느님, 어둠의 빨리 내리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아, 질 좋은 포조주 한 잔이여', '날씨는 춥고, 방안은 침침하다, 오늘따라 양피지에는 잔털이 왜 이리도 많은가' 따위의 낙서는 다 문서 필사사들의 이러한 고통의 호소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옛날에도 있듯이, 우필 잡는 것은 손가락 세 개라도 일을 하는 것은 온몸이다. 그래서 온몸이 쑤시고 뒤틀리는 것이다."

*[사진]은 얼마 전까지 백석 시를 옮겨 쓰던 (위에 소개한 브랜드의) 노트입니다. 깊은 밤 필사를 하다보면 저리 실수를 자주 저지릅니다.



장미의 이름(상)

저자
움베르토 에코 지음
출판사
열린책들 | 2009-11-30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1981년 스트레가상 1982년 메디치상 1994년 서울대학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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