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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485] 책도 운명이란 것이 있어서 똑같은 책이라도 어떤 책은 오래 귀하게 대접을 받고 어떤 책은 허드레로 쓰이다가 결국 폐지로 버려지기도 합니다. 헌책방은 버려질 책들의 마지막 보루 같은 곳이라 생각합니다.

오늘 350권쯤, 꽤 많은 책이 들어왔는데 차에서 책을 내리며 바로 분류 작업을 했습니다. 폐지 모으는 어르신께서 버릴 책은 바로 챙겨달라 부탁하셔서 책방으로 들이지 않고 바로 길에서 버릴 책, 살릴 책을 나눴습니다. 가져온 책 절반 넘게 어르신께 드렸습니다.

헌책방 책방지기로 보람을 느낄 때는 내 손을 거치지 않았으면 폐지가 되었을 책들을 살렸을 때죠. 길바닥에서 책을 나누다 스물다섯 권의 시집을 발견했습니다. 출간된 지 20년이 넘은 '창비시선' 시집들이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조태일 선생님의 시집이 3권씩이나 있어 반가웠습니다. 

조태일 선생님의 <국토>, <가거도>는 보았으나 <자유가 시인더러>는 전혀 알지 못하는 시집이었습니다. '살린 책'들은 우선 책방 구석에 쌓아두고 시집들의 묵은 때를 벗겨냈습니다. 한 번도 펼친 흔적이 없는 책이었으나 표지에 묵은 때가 두껍더군요. 책도 자주 손을 탄 책이 깨끗한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들이 찾지 않으면 금세 먼지가 내려앉고 낡은 것으로 변합니다. 

시집이 사랑받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시집이 베스트셀러로 오른 경우를 보기 힘들군요. 시집은 초판으로 1000~2000부를 찍는데 초판 판매도 어려운 것이 현실입니다. 방송이나 언론의 주목을 받지 못하면 등단한 시인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많이 팔리지 않는다 해서 의미 없다 할 수 없겠지요. 민영 선생님의 <용인 지나는 길에> 후기를 보면 첫 시집 <단장>에 대한 회고가 나옵니다. 시인의 마음이란 원래 독자의 수와는 상관없는 것입니다.

"첫 시집 <단장>이 나왔을 때, 내 주위에는 짙은 어둠과 적막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리하여, 내 어줍잖은 노래들을 읽어 줄 독자가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하였고, 오직 해 저문 들판에 서서 씨를 뿌리는 농부의 마음으로 책을 서점에 내맡겼었다.

그러나 <단장>은 예상과는 달리 한 해 동안 20부가 팔렸으며, 그것은 내가 서점에 내놓은 그 책의 전량이기도 했다. 그때부터 내 오관에는 알 수 없는 힘이 솟았고, 그것은 아직도 나를 질타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즉, 자기가 사는 시대의 온갖 상황을 똑바로 보고 목청껏 노래 부르기만 한다면, 언젠가는 귀담아 들어줄 사람도 있으리라는 확신이다."

글을 잘 쓰고 싶은 분들이라면 시집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시는 '정제된 언어의 결정結晶'과 같아 풀어쓴 문장과는 격이 다릅니다. 시가 가진 절제미와 압축미야말로 문장이 갖춰야할 최고의 선이 아닐까요. 매번 일지를 쓸 때마다 '절제미와 압축미'가 떨어진다는 반성을 합니다만...

역시 글이 길어졌습니다. 버려질 뻔 했던, 시집들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읽은 시집만 내놓을 생각입니다. 욕심을 버릴 수가 없군요. 봄은 언제나 시집을 읽기엔 참 좋은 시절입니다. 조태일 선생님의 시 한 수 옮깁니다. <가거도>에 실린 '봄소문'입니다. 오늘 같은 날에 읊조리기 좋은 시지요.

..........

봄소문

소문은 봄이라 들리지만
틀릴 때도 있단다,
아직은 봄이 아니다.

잘못 알고
싸립문 빵긋 열고 나온
어린것들아.

아직도 바람끝이
차고 매섭구나.

피려는 꽃봉오리도 
다시 오므라들지 않느냐.

폭풍한설 몰아치면
오기는 꼭 오는
봄이란다.

들어가서 안 나오진 말고
옷을 더 껴입고 나오려무나
어린것들아.

[사진]은 지난 봄에 찍어둔 겁니다.




가거도(창비시선 37)

저자
조태일 지음
출판사
창작과비평사 | 2012-02-06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제목 가거도 저자 조태일 출판사 창비(창작과비평사) 출판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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