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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일지

[D+492] 손바닥 소설_동백꽃

sosobooks 2015. 3. 18. 20:48




[D+492] 봄비도 내리고 '달달한' 손바닥 소설 한 편 올립니다. 손바닥 소설 모임을 하면서 지난해 이맘 때 썼던 소설입니다. 1년 사이 다시 '봄'을 주제로 다시 이야기를 만드는데 달달함은 빼고 쓰고 짠 맛으로 팍팍한 글을 쓰고 있습니다. 봄꽃 사진도 쟁여둬야 하고, 봄맞이 숙제가 여럿이라 고민이 많군요.

가능하면 책에 대한 내용을 이야기 속에 포함시키려 노력하는데 어렵습니다. 역시 시간을 두고 다시 훑어보니 모자란 부분들이 확실히 보입니다. 혹시 <손바닥 소설>을 구입해 읽으셨던 분들은 '무릉서점-외전'으로 생각하고 보시면 좋겠습니다.

.............................

<동백꽃>

.
“야, 443번!”

내무반 맨 안쪽 끝자리에 비스듬하게 누워있던 남 병장이 불렀다. 나를 부르는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그는 막사 뒤편으로 데리고 가더니 삼청교육대 시절부터 썼던 기합용 목봉에 걸터앉아 담배를 건네며 협박과 애원을 섞어 그녀에게 보낼 답장을 빨리 내놓으라 했다. 그녀의 편지가 도착하는 날이면 항상 남 병장은 애가 달았다.

..
그녀의 첫 ‘위문’ 편지가 도착한 것은 내가 신병교육대에 입소하던 날이었다. 내무반장 남 병장과 3명의 조교는 입소 첫날부터 군기를 잡는다는 이유로 새벽까지 구타와 얼차려와 욕설을 적절하게 섞어가며 신병들을 괴롭혔다. 새벽 3시쯤 상황실 당직 근무를 끝내고 자신의 내무반으로 돌아가던 정훈병이 노란 고무줄로 묶은 한 꾸러미 위문편지를 악귀 같은 남 병장에게 공손하게 건네준 다음에야 우리는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시시덕거리며 남 병장과 조교들이 위문편지 읽는 소리 때문에 아마 대부분의 신병은 잠을 설쳤을 것이다.


신교대 입소 다음 날, 저녁 식사를 마친 신병들은 침상에 엎드려 편지지 1장을 받은 후 강제로 ‘부모님 전 상서’를 써야 했다. 신교대에 잘 도착했으며 훈련이나 내무반 생활도 편하며 군 생활 열심히 해서 철들어 제대하겠다는 편지를 갱지에 등사된 견본 편지대로 옮겨 썼다. 남 병장과 가장 먼, 막사 입구에 엎드려 편지를 쓰고 있던 내가 남 병장의 눈에 띈 것은 단지 글씨가 단정하다는 것 때문이었다. 남 병장은 어제 밤새 얼굴이 예쁠 것 같은, 여학생이 보낸 편지를 1순위로 몇 통인가 골라냈고 나머지는 계급이 낮은 순으로 조교들에게 돌아갔다. 원래 훈련병에게 1통씩 돌아가야 할 위문편지를 자기네끼리 갈라붙이는 것은 신교대의 오랜 전통인 듯싶었다.


남 병장이 내 뒤통수를 후려치며 내무반장실로 끌고 갈 때까진 내가 무슨 맞을 짓을 했는지에 대한 이유를 떠올리느라 머릿속이 복잡했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가 아마 나와 같은 심정이겠지. 마흔다섯 명의 신병들이 침상 끝에 도열해 불쌍하다는 표정으로 남 병장에게 끌려가는 나를 바라보았다. 내무반장실 문을 닫자마자 남 병장은 편지 한 통을 내밀었다. 그리고 조심스레 사진 한 장을 보여주었다. 약간 빛바랜 사진이었다. 승용차 뒷좌석에서 살짝 고개를 내밀고 있는 사진 속 그녀는 예뻤다. 바람에 부드러운 머리칼이 날리고, 차 뒤쪽 누군가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쌍꺼풀은 없었지만 눈매가 길고 선했다. 하얀 볼이 동백꽃처럼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올이 굵은 진초록 스웨터를 입고 있어 빨간 볼이 더 선명하게 보인다 생각했다. 사진 뒤편을 넘겨보려는 순간 남 병장은 사진을 빼앗듯 가져갔다.


“야 이 새끼야, 남의 여자 사진을 뭘 빤히 훑어 보냐!”


남 병장은 사진 속 그녀가 자신의 것인 양 말했다. 그리곤 편지를 읽고 답장을 써오라 했다. 마지막 줄은 ‘남상일 병장 올림’이라고 제대로 쓰라 몇 번이고 일렀다.


“병장님 답장 내용은...”


내가 말꼬리를 흐리자, “그것도 니가 알아서 써야지 새끼야”라며 날카롭게 윽박질렀다. 남 병장 앞에서 차려 자세로 그녀의 편지를 읽었다. 판에 박은 위문편지였지만 묘하게 단거리 전력질주하듯 읽혔다. “국군 아저씨께”로 시작하는 첫 문장부터 “경주에서 김수영 올림” 마지막 줄까지 그녀는 단 한 곳도 고치지 않고 또박또박 썼다. 방학동안 경주로 답사를 왔으며, 동아리 선배의 부탁으로 위문편지를 쓰게 되었으며, 비록 위문편지를 보냈지만 가능하다면 답장을 받아보았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밝고 경쾌했으며 무엇보다 감성이 풍부하단 걸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었다. 내가 편지를 읽고 있는 동안 남 병장은 멍한 표정으로 수영의 사진을 훑어보고 있었다. 내 머릿속은 복잡했다. 훈련병 시절부터 군 생활이 꼬이기 시작하는 징조였다.

...

남 병장은 다음 날 밤 점호시간까지 자신에게 답장을 내놓으라 했다. 어떻게 답장을 써야 하나 고민했다. 군대 가 있는 동안 굳이 기다릴 필요가 없다, 상처 주고 온 미연이 생각났다. 미연에게 보낼 편지를 수영에게 보낸다 생각했다. 물론 편지의 주인공은 남 병장이었다. 남 병장은 나의 편지를 마음에 들어 했지만, 만약 일주일 내에 답장이 오지 않으면 이를 악물어야 할 일이 생길 거라고 비열하게 웃으며 경고했다. 설마 답장이 올까, 일말의 기대는 있었지만 온다고 해도 대신 거짓 답장을 보내야 하는 일로 골치가 아플 테니 차라리 남 병장에게 한번 호되게 당하고 마는 것이 더 편하리라 마음 먹었다.


그런데, 설마 했던 답장이 도착했고 나는 남 병장 앞에서 저번과 마찬가지로 차려 자세로 수영의 편지를 읽어야 했다. 갈수록 수영의 편지는 내용이 넓고 깊어졌다. 전공을 바꾸고 싶다는 개인 고민부터 가족 이야기까지 그리고 지금까지 두 번 남자친구를 사귀었지만 지금은 헤어졌다는 비밀스런 이야기도... 수영의 편지글은 흡사 마음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펜팔 친구를 만난 듯한 느낌이었다. 대신 써서 보낸 답장에 이런 편지를 보냈다는 사실에 마음이 불편했다. 어디까지 숨겨야 하는지,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수영의 편지를 읽고 답장을 써야하는지 심사가 복잡하게 얽히기 시작했다.


수영은 일주일에 두 번은 꼬박꼬박 편지를 보내왔고, 나는 남 병장의 이름을 빌어 답장을 썼다. 어서 빨리 신병교육기간 6주가 지나가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남 병장의 편지를 대필하는 일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그것뿐이었다. 남 병장은 어떻게든 구실을 만들어 수영과 만날 볼 심산이었다. 끊임없이 면회를 오도록 만들어라, 노골적으로 압박했지만 그렇게 하면 부담스러워 답장도 보내지 않을 것 같다는 말로 불만 가득한 남 병장을 매번 설득해야 했다. 신교대 퇴소일이 다가오자 수영에게 지금까지 편지를 쓴 사람은 남 병장이 아니라 나였다는 사실을 어떻게든 알리고 싶었다. 남 병장이 선선히 주소를 알려줄 리 없었다. 남 병장은 내가 떠나도 편지를 써 줄 친구가 입소할거라 믿는 눈치였다.

....

자대 배치 받고 신교대를 떠나기 전날 밤, 남 병장은 나에게 내일 떠나기 전에 마지막 답장을 써놓고 가라 으름장을 놓았다. 써놓고 가든지 아니면 오늘 밤새도록 괴롭힘을 당하든지, 사이에서 선택사항은 없었다. 이제 마지막이 될 수영의 편지를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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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화도의 그 붉던 동백꽃은 해마다 피고 졌겠지요.”

이 문장이 어디서 왔는지 아시나요. 남 병장님 편지를 읽을 때마다 마음이 포근해졌답니다. 정말 봄이 오는가 봐요. 며칠 전 선운사 답사를 다녀왔는데 동백꽃이 부끄럽게 피었더군요. 이만 줄입니다. 답장 기다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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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장 기다리겠습니다,를 마음속으로 나직이 읊조리며 남 병장의 얼굴을 흘낏 보았다. 수영의 사진을 보며 묘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침상에 엎드려 답장을 쓰기 시작했다. “연화도의 그 붉던 동백꽃”은 수필 작법 시간에 배운 김성우*의 글 한 대목이란 사실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 내용이 오랜 세월 잊지 못했던 첫사랑 소녀에게 보낸 편지글에서 시작되는 것도. 수영은 남 병장을 아니 나를 만나지는 못했지만, 애틋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상상했다.


-

‘연화도의 그 붉은 동백꽃’은 끝내 이룰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란 걸 압니다. 저는 에릭 오르세나**가 가브리엘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끝내 설명할 수 없군요. 1년 전 이맘 때 선운사에 다녀온 적 있습니다. 그때 썼던 시 함께 보냅니다.

봄볕 피해 
선운사 만세루 
처마 그늘 아래 앉았더니 
사랑하는 이가 
아직도 맥박 뛰고 있는 
동백꽃 주워 건넨다 
미소 띤 가섭 
부처님 보는 듯 
발갛게 익은 나 
당신을 보는 듯 
-


수영이 에릭 오르세나의 책을 찾아보고 이 편지를 누군가 대신 써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길 간절하게 바랐다. 수영이라면 분명 내가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살펴볼 거라 믿었다. 살짝 끼워 넣은 그 문장의 숨겨진 뜻을 남 병장이 읽는다 해도 알아챌 리는 없었다. 편지 끝에 미연과 함께 선운사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썼던 시를 덧붙였다. 편지지를 접자 신교대 마지막 기상 나팔 소리가 울렸다. 심장 깊숙한 곳에서 붉은 동백꽃 두 송이가 툭 함께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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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우, 전 한국일보 논설위원. 통영 욕지도가 고향이다. ‘동백꽃 필 무렵’, ‘돌아가는 배’ 등 빼어난 수필을 남겼다. 2012년 한길사에서 <명문장의 조건>을 펴내기도 했다.
**1988년 콩쿠르상을 수상한 에릭 오르세나는 7년 넘게 미테랑 대통령의 보좌관으로 일하며 연설문을 ‘대신’ 작성했다. 그 당시 엘리제궁에서 일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대필작가 가브리엘의 고백>을 썼다. <대필작가 가브리엘의 고백>은 1996년 고려원에서 출간되었으나 이듬해 고려원이 부도가 나면서 빛을 보지 못했다. 2004년 옛 고려원 직원들이 주축이 되어 고려원북스를 세웠지만 이 책의 재발간 소식은 없는 상태.




명문장의 조건

저자
김성우 지음
출판사
한길사 | 2012-11-30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모든 문장론을 집대성한 ‘만인이 쓴 문장론’ 동,서양의 위대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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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필작가 가브리엘의 고백

저자
에릭 오르세나 지음
출판사
(주)고려원북스 | 1998-01-01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초판. 양호.에릭 오르세나 (Erik Orsenna) - 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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