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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522] 간디 고등학교 이임호 선생님께서 귀한 글을 보내주셔서 싣습니다. 제목은 '왜 책을 읽어야 하는가 - 책 읽기와 글쓰기에 관한 20개의 단상'입니다. 긴 글이나 꼭 끝까지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보름마다 한 번씩 진주문고에서 이임호 선생님 뵙고 이야기 나눌 때마다 배움이 늡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사진]은 오래 전 태국 여행할 때 찍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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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책을 읽어야 하는가>

- 책 읽기와 글쓰기에 관한 20개의 단상

이임호 - 간디고등학교 교사

[이 글은 진주의 고등학생 독서회 모임에서 한 이야기를 정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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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많지만 거창한 것보다 작고 구체적인 데서 찾아보자. 예컨대 심리적인 건강을 위해서 독서가 얼마나 유용한지 생각해 볼 수 있다. 책의 좋은 점은 마음을 위로하고 위안을 주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일상에서 자주 경험하는 일이다. 슬픈 일, 괴로운 일을 겪을 때 한 장씩 책장을 넘기며 읽다보면 어느새 마음이 차츰 회복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책에 담긴 내용보다도 읽기라는 행위가 아픈 마음을 매만져주는 것 같다. 읽는 행위 속에는 분명 신비한 치유력이 있다. 슬픔에 관한한 시간은 언제나 우리 편이다. 감정의 격류가 지나가고 나면 마음은 말없는 대화 상대를 필요로 한다. 책에 적힌 말들은 현실의 언어들보다 덜 생생해서 견딜만하다. 책갈피는 말에 지치고 상처 입은 내면이 휴식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장소이다. 책이 마련해주는 휴식을 통해서 우리는 좀더 진실한 대화를 예비할 수도 있다. 말없이 지내고픈 욕망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 나누기를 갈망하는 욕망, 그 사이에 책이 있다. 누구나 성장기의 기억 저편에는 슬픈 날 골방에서 읽었던 책이 한두 권 있기 마련이다. 그 책들은 토라지고 상처 입은 마음을 토닥이고 달래서 다시 세상 속으로 우리를 보내주었다. 다시 시작해보라는 격려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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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책은 마음만 치료한 것이 아니라 몸이 앓는 병을 고치기도 했다. 옛날 서양에서는 귀족들이 목소리 좋은 시종에게 책 읽는 역할을 맡겼다고 한다. 치통이나 소화불량으로 괴로울 때나 불면증으로 잠 못들 때, 그 시종은 주인 곁에서 조용히 책을 읽어주었다고 한다. 그때는 책이 약을 대신하던 시절이었다. 우리 역사에서도 찾아보면 이런 역할을 맡았던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가끔 이런 의문이 들 때가 있다. 왜 우리나라에는 좋은 오디오북이 없을까? 외국의 서점에 가보면 목소리가 좋은 명배우들이 낸 오디오북을 많이 볼 수 있다. 런던의 한적한 공원에서 리처드 버튼이 낭독한 셰익스피어를 듣고 있던 어느 할아버지가 기억난다. 그는 버튼의 목소리로 셰익스피어를 감상하는 맛이 얼마나 근사한지 은근히 자랑하였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병헌이나 한석규 같은 배우들이 한국의 명작을 낭독해서 들려주면 어떨까. 책 읽기에는 세 가지 차원이 있다. 맘속으로 읽는 것, 소리 내어 읽는 것, 다른 사람이 읽는 것을 듣는 것. 이 세 가지는 느낌의 무늬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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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삼독(書三讀)라는 말이 있다. 책을 읽을 때는 반드시 세 가지를 읽어야 한다는 뜻인데 첫째는 책의 내용을 읽고, 둘째는 그 책을 쓴 사람의 마음을 읽고, 셋째는 책을 읽고 있는 나를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책을 빨리 읽어서는 안 된다. 가능한 한 느리게 천천히 읽는 것이 좋다. 우리의 기억력은 믿을만한 것이 못된다. 보통 사람들은 읽고 나서 3일이 지나면 책 내용의 30%를 잊어버린다고 한다. 한달이 지나면 70%를 잊어버리고 1년이 지나면 머리에는 고작 3% 정도가 남는단다. 그런데도 우리는 제목만 보고 전에 다 읽은 책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책이 귀한 시절에는 좋은 책은 두세 번씩 읽는 게 당연했다. 그리고 더 옛날에는 반복해서 소리 내 읽으며 암기하던 서당식 독서법이 있었다. 그런 공부를 전근대식이라고 폄하할 수 없다. 서삼독이라는 독서의 깊은 경지가 거기서 나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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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의 생 갈렌에는 서기 700년경에 세워진 오래된 도서관이 있다. 그 도서관의 이름은 ‘영혼의 약국’이다. 이 도서관은 인쇄술이 알려지기 전에 손으로 필사해서 만든 책들이 수천권 소장되어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이곳은 또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쓴 중세의 수도사 토마스 아 캠피스가 머문 곳으로도 유명한데 아 캠피스는 책에 대한 열렬한 사랑의 말을 남겼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도 소개되어 있는 이 말은 다음과 같다. 
“내 이 세상 도처에서 쉴 곳을 찾아보았으되 마침내 찾아낸 책이 있는 구석방보다 더 나은 곳은 없더라.In omnibus requiem quaesivi, et nusquam inveni nisi in angulo cum libro” 
신앙의 안식처를 찾아서 떠돌이로 살았던 방랑의 수도사가 천국을 젖과 꿀이 흐른 곳이 아니라 책이 가득한 곳으로 상상했다는 것이 의미심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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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책속에 길이 있고 답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말이 과연 옳은 말일까? 책은 정말 해결사일까? 좋은 책은 해답을 알려주는 책이 아닐 수도 있다. 좋은 책은 어설픈 해답보다는 차라리 직면한 어려움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려고 한다. 빨리 알려주는 해답은 틀린 해답이기 쉽다. 진리의 언어는 유창한 달변이 아니다. 더듬거리는 눌변이 진리의 화법이다. 술술 나오는 말은 의심해야 한다.
책 속에 길이 있다는 말은 책속에 답이 있다는 뜻이 아니다. 이 말은 문제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책이 도와 줄 수 있다는 의미에 가깝다. 문제를 또렷하게 부각시켜 제대로 인식시키는 것, 그래서 올바로 질문하게 하는 것이 먼저다. 고통조차도 불투명한 고통보다 형태가 부여되고 이해된 고통이 더 견딜만하다. 사람은 스스로 인식해낸 것은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다. 정확히 인식한 문제는 언젠가는 해결될 수 있다. 왜냐하면 올바르게 제기된 질문에는 이미 답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제나 질문이 해답보다 더 중요하다. 그리고 어떤 문제에는 해답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도 좋은 책의 역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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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하이데거는 “모든 물음에는 의문이 충분히 무르익을 시간이 필요하다. 기다림은 사유의 속성이다. 질문한다는 것은 기다릴 수 있다는 것을 의미 한다.”는 말을 하였다. 독서의 장점은 물음이 무르익는 과정을 천천히 마음속에 형성시켜준다는 점이다. 생각의 발효와 숙성. 이것은 다른 매체가 흉내 낼 수 없는 영역이다. 아무리 급해도 책에서 해답을 금방 구할 수 없다. 조급하고 어수선한 마음을 붙들어 매고 단단히 결박해야만 다가갈 수 있는 세계가 있다. 집중과 몰입이라는 인내의 문을 통과해야만 볼 수 있는 세계가 있다. 진리는 쉽게 자신의 얼굴을 노출하지 않는 법이다. 지식의 본질은 은폐성에 있다. 습득 과정의 노고를 통과한 사람에게만 진리는 계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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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는 정신의 훈련장이다. 집중하는 힘, 끈기, 신중함 같은 좋은 습관도 길러준다.
인터넷은 장점 속에 약점이 내재해 있는 특이한 매체이다. 경탄할 만큼 간편한 지식습득 방법. 그러나 이것에는 치러야할 대가가 있다. 궁금한 것을 검색해서 즉각 아는 것은 놀라운 기술이지만 검색은 사유과정이 생략된 학습이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부실하고 무책임한 공부법이다. 인터넷은 수고와 인내와 기다림의 과정을 생략한 채 손쉽게 해답을 알려주기 때문에 사유의 지속 능력과 의지를 처음부터 약화시켜버린다. 따라서 지식의 가치도 대폭 반감된다. 손쉽게 얻은 것을 값있게 여길 리가 없다. 
날마다 쏟아지는 새로운 기계들에 현혹되어 조그마한 화면에 눈을 박고 있는 것이 이제 일상의 풍경이 되었다. 거리, 자동차, 지하철, 카페, 공원, 학교, 도서관, 기차, 비행기.... 어디든 마찬가지다. 대화와 사색이 움터야 할 공간으로 야금야금 침투해 들어와서 이제 세상은 스마트폰이 점령하였다. 연인끼리도, 친구끼리도, 가족끼리도 마주 앉아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지 않는다. 
“문명은 짧은 이불과 같다. 머리를 덮으면 발이 나오고 발을 덮으면 머리가 나온다.” 이 서양속담은 오늘의 상황을 잘 요약해준다. 편리의 이면에는 반드시 상실과 파괴가 감추어져 있다. 댓가 없는 편리는 없다. 문제는 편리가 앗아가는 것이 잘 안 보인다는 것이다. 책이 길러주는 미덕들을 상실한 댓가로 누리는 쾌락이 스마트폰의 즐거움인데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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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와 글쓰기에는 두 가지의 대조적인 차원이 있다. 순수한 유희와 엄격한 훈련. 놀이를 잘 즐기려면 규칙을 정확히 알아야 하듯이 글을 읽고 쓰는 일에도 ‘말의 규칙’에 대한 예민한 감각이 필요하다. 언어는 다루기 힘든 연장이다. 독서나 글쓰기는 너무 친숙한 일이어서 저절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익숙한 일도 능숙하게 잘 하려면 오랜 수련의 과정이 필요하다. 꾸준한 연습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피아노 연주나 테니스 배우기와 비슷하다. 기초를 잘 익힌 피아니스트나 테니스 선수를 보면 기량 속에 자유자재한 능숙함이 있다. 평범한 관객의 눈에는 잘 안 보이지만 그 능숙함의 이면에는 보이지 않는 기나긴 수련의 시간이 숨어있다. 독서와 글쓰기도 마찬가지이다. 읽기와 쓰기의 기초적 토대가 탄탄하게 구축되어 있어야 책과 글을 가지고 놀 수 있다. 청소년기는 어떤 분야를 막론하고 훈련과 연습의 시기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것을 생략하면 즐거움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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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기자가 헤밍웨이에게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느냐고 물었다.
“단 한가지뿐입니다. 일어나면 책상에 앉는 것!”
위대한 작가에게도 방법은 단순했다. 많이 읽고 많이 쓰는 것. 그는 <노인과 바다>를 200번 이상 고쳐 썼다고 한다. 
피아니스트들에겐 이런 금언이 있다.
“연습을 하루 쉬면 내가 알고, 이틀 쉬면 평론가들이 알고, 사흘 쉬면 청중이 안다.”
왕도는 없다. 연습과 훈련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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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과 생각을 언어로 표현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는 타자를 설득하는 행위이다. (때로는 글 쓰는 자신도 타자가 된다.) 이 설득은 지적 기율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공부란 이런 지적 기율을 연마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능력을 습득하지 않고서는 진리에 다가갈 수 없다. 뉴턴은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직관적으로 어떤 힘의 존재를 깨달았지만 그 힘이 우주를 움직이는 기본 원리라는 것을 설명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수학이라는 ‘지적 연장’에 능통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과학 분야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자본주의의 비인간적인 모습에 분노한 사람들은 수없이 많았지만 자본주의의 근본적 모순을 꿰뚫어 본 것은 마르크스밖에 없었다. 마르크스가 위대하다면 그것은 그가 도덕적 정열 못지않게 지적 설명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자연의 신비를 밝히기 위해서는 직관력도 필요하고 세상의 불의를 보면 분노도 느낄 수 있어야 하지만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 진리와 정의는 보편성 있는 언어를 획득해야만 실천력을 가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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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턴에게서 천재성만 본다면 뉴턴의 반쪽만 보는 것이다. 천재성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뉴턴은 자신의 재능 못지않게 앞선 세대의 지적 유산을 잘 계승한 사람이다. 뉴턴은 자신의 업적을 칭송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좀더 멀리 볼 수 있었던 것은 거인의 어깨 위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천재 뉴턴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케플러와 갈릴레이가 먼저 있고서야 가능했던 것이다. 뉴턴은 천재적인만큼 겸허했던 것이다. 공부를 하는 것은 이렇게 우리보다 앞서 살았던 사람들의 진리추구의 대열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책속에 담긴 지식은 지난 역사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어둠과 무지와 편견과 싸우며 이룩한 집적물이기 때문에 결코 가벼운 것일 수 없다. 책은 우리를 거인의 어깨위로 올려주는 사다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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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말이지만 세상의 모든 책이 다 좋은 책은 아니다. 정말 좋은 책은 읽는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책이다. 사람은 위안과 기쁨을 통해 배우기도 하지만 각성의 아픔 없이 성장할 수 없다. 모든 사람에게는 저마다 ‘알을 깨고 나와야’ 하는 순간이 있다. 
스무살 무렵에 카프카가 친구 막스 브로트에 보낸 편지에 이런 구절이 있다.

“나는 오로지 꽉 물거나 쿡쿡 찌르는 책만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읽는 책이 단 한 주먹으로 정수리를 갈겨 우리를 각성시키지 않는다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우리가 책을 읽어야 하는가? 우리가 필요로 하는 책이란 우리를 몹시 고통스럽게 해주는 불행처럼, 우리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사람의 죽음처럼, 우리가 모든 사람을 떠나 인적 없는 숲 속으로 추방당한 것처럼, 자살처럼, 우리에게 다가오는 책이다. 한 권의 책은 우리들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이어야만 한다.”

어떤 책은 읽고 나면 읽기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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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 독재시절 우리나라의 지식인들에게 ‘사상의 은사’ 역할을 했던 리영희 선생이 <레미제라블>을 읽으며 불어를 독학한 이야기를 소개한다.

지난 연말, 가벼운 감기를 업신여긴 업보로 어줍잖게 폐렴이 되고 또 늑막염까지 도지는 바람에 달포 가까이 병상에 누워 지내게 되었다. 회복기에 들어 지루함을 달래려고 여러 해 만에 다시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을 읽기 시작한 것이 두 달 만인 엊그저께야 르리브르 드 포슈( Le Livre de Poche) 판 세 권의 2,000쪽을 겨우 끝낼 수 있었다.
<레미제라블>을 읽기는 이번이 세 번째다. 첫 번째는 일제 치하의 중학생 때 일본어판 세계 문학전집 중의 한 권으로 읽었다. 번역본의 제목은 <憶! 無情>이었다. 여러 대목에서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난다. 두 번째는 박정희 정권 말기에 2년 동안의 형무소 생활 중에 프랑스어 공부를 위해서 국역본과 대조하면서 읽었다. 그 책에는 “수번호 3710”이라고 기록된 독서 열독 허가증이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빛이 바랜 채 그대로 붙어 있다. 이때 워낙 단단히 공부했던 탓에 이번에는 사전도 별로 찾지 않고 즐겁게 끝낼 수 있었다.
<레미제라블>의 감동 하나를 소개한다. 자베르 경위와 그의 부하들이 어느 날 밤 천신만고 끝에 장 발장을 파리 시내의 으슥한 다리 위에 몰아넣는 데 성공했다. 장 발장은 이제 꼼짝없이 주머니 속에 든 쥐가 되었다. 그는 마침내 체념한다. 길고 긴 추적과 도피의 경주가 추적자들의 승리로, 도피자의 패배로 끝나려는 순간이 다가왔다. 이 상태에서 마지막 결판을 내려고 부하들이 덮치려고 하자 자베르가 제지한다.
“안 돼! 구속영장을 안 가져왔어. 영장 없이 연행한 사실이 신문에 보도되면 의회가 검찰총장과 내무장관 파면 결의를 할 거야. 원통하지만 오늘은 그만 철수하자! 구속영장을 받아 가지고 다시 나오자.”
이것이 지금으로부터 150여 년 전인 1840년대의 프랑스였다. 나는 그로부터 140년이 지난 뒤에, 구속영장도 없이 끌려가서 철창 속에 갇힌 대한민국의 교도소 안에서 1980년에 이 대목을 읽으면서 그 대목 하나의 감동만으로도 빅토르 위고에게 감사했다. 그리고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야만성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140년 전의 프랑스의 사법제도와 국가 공권력의 문명성이 빛날수록, 20세기도 끝나가려는 시기의 대한민국이 암흑으로 보였다.

불의의 시대에 저항하며 살았던 한 영혼에게 책 한권이 이런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레미제라블>은 옷깃을 여미며 익어야 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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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 가면 제일 좋은 자리를 자기 계발서들이 차지하고 있다. 잘 팔리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류의 책이라고 해서 전부 수준이 낮은 것은 아니다. 어떤 책들은 보기보다 내용도 알차다고 한다. 돈 버는 법과 성공 요령을 노골적으로 가르쳐주는 것도 아니고 나름의 철학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책들이 절대로 하지 않는 질문이 있다. 돈과 성공 자체에 대한 성찰은 없다. 돈과 성공의 가치는 너무 당연한 것이어서 회의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질문은 애초부터 차단된다.
돈과 성공이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될 수 있는가?
꼭 성공해야만 좋은 인생인가? 
성공하지 못하면 실패자인가? 
인생에서 성공했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을 판단하는 것은 누구인가? 
몇 가지 물질적 잣대만으로 행복을 설명할 수 있는가? 
자기 계발서들은 이런 질문들을 절대 하지 않는다. 본질적인 문제들을 모두 외면당한다. 우리 사회가 불행한 것은 성공의 비법과 돈 버는 요령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부와 성공이 없어서가 아니라 부와 성공 때문에 사회는 병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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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토와 힐링에 대한 열풍이 급속히 식어가고 있다. 이 유행이 확산시킨 담론들 중에서 특히 ‘낙관주의 언어’들이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긍정 심리학으로 무장하고 꿈은 이루어진다는 식의 자기암시만 하면 운명을 바꾸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순진한 ‘정신승리법’의 약효는 길지 않다. 우리가 부딪히는 문제들은 어쩌면, 희망이 없어서가 아니라 끝까지 절망할 능력이 없어서 생기는 것인지도 모른다. 절망의 시간을 생략하고 희망의 수사로 서둘러 문제를 해결해버리는 사회는 자기기만에 빠진 사회이다. 좋은 책은 온 세상 사람들이 ‘희망을 가지세요.’라고 말할 때, ‘당신은 충분히, 바르게 절망하였습니까?'라고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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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은 바위처럼 단단하고 요지부동이다. 어떤 글이 이 견고한 세상에 충격을 가하고 균열을 일으킬 수 있을까. 
“나는 책 읽는 게으름뱅이를 혐오한다.”
이것은 니체가 한 말이다. 
세계를 바꿀만한 책이 있을까? 그것을 알 수는 없지만 만약 그런 책이 있다면 어떤 자세로 쓴 책인지는 짐작해볼 수 있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읽기와 쓰기’라는 장에서 니체는 이런 말을 하였다. 
“나는 모든 글 가운데서 피로 쓴 것만을 사랑한다. 피로 써라. 그러면 그대는 피가 곧 정신임을 알게 되리라. 다른 사람의 피를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책 읽는 게으름뱅이를 미워한다. 피로 쓰는 자는 읽히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암송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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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는 고된 일이다. 공부가 즐겁다는 말에 속지 말자. 만약 공부가 즐겁다면 그것은 고통을 동반한 즐거움일 것이다. 높은 산 아래서 이제 막 등산을 시작하는 사람에게 산행이 즐거울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앞으로 당신을 기다리는 것은 고통의 시간이라고 정직하게 말해야 한다. 힘겹게 올라간 산정에서 바라보는 풍경! 공부의 궁극적인 즐거움은 그런 것에 비유할 수 있다. 한발 한발 내딛는 발걸음이 없었다면 그런 희열도 없다. 인격을 고양시키는 참다운 환희는 고통 끝에 온다.
그런데 요즘은 즐기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지며 젊은이들을 충동하고 있다. 즐거울 줄 알고 시작했다가 힘들면 쉽게 포기하고 만다. 즐거움은 처음부터 도래하는 것이 아니다. 과정의 지난함을 견뎌내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선물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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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진리를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그러나 책만큼 효과적으로 진리를 매개해주는 것도 없다. 말과 언어의 힘을 맹신해서도 안 되지만 불신해서도 안 된다. 문자가 현실세계는 아니다. 그러나 문자 없이 우리는 세계를 인식할 수 없다.
독서 즐거움은 십대 때 가장 강렬하게 계시된다. 책을 통해 얻는 기쁨은 모든 세대가 다 누릴 수 있지만 그 희열이 전율로 다가오는 시절은 십대 때뿐이다. 그것은 젊은 영혼에게만 주어진 가장 큰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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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어서 어디에 써먹지? 특히 어려운 책을 읽을 때면 이런 질문이 떠오른다. 그럴 때 꼭 기억해 둘 만한 이야기가 있다. 
플라톤의 대화편에는 소크라테스의 최후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소크라테스는 사형집행을 기다리며 독약이 준비되는 동안에도 차분하게 피리로 음악 한 소절을 연습했다고 한다. ‘대체 지금 그게 무슨 소용이오?’ 누군가 그렇게 묻자,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래도 죽기 전에 음악 한 소절은 배우지 않겠는가.”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 피리를 배우는 소크라테스에게 그게 무슨 소용이냐고 질문하는 사람은 모든 일을 실용과 효용의 관점에서 보는 사람이다. 그런 기준으로 보자면 소크라테스의 행동은 쓸데없는 일이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는 죽기 전에라도 음악 한 소절은 더 배우지 않겠느냐고 대답하는 소크라테스에게서 말할 수 없이 깊은 숭고함을 느낀다. 이 경외의 근거는 무엇인가? 인간은 배우는 존재라는 것, 쓸모가 아니라 배움 자체에 진정한 의의가 있다는 것, ‘쓸모없음의 쓸모’가 참다운 공부의 경지라는 것, 소크라테스의 최후는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