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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일지

[D+268] 썩으러 가는 길

sosobooks 2014. 8. 6. 13:41


[D+268] 총기난사 사고가 터진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슬픈 일이 일어났습니다. 군대에서 일어나는 비극은 그 조직의 특성상 사라질 수 없습니다. 모병제가 아닌 강제적 징병제에선 비극의 강도가 심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일본 군국주의 군대의 잔재인 폭력으로 군기를 잡는 문화가 남아 있는 한 아무리 대책을 세운다 한들 허사입니다. 

거기에다 가진 자들의 특혜가 남아 있는 이상 일반 국민들의 분노와 박탈감을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청문회 때마다 불거지는 병역특혜 의혹은 고정 레퍼토리니까요. "참으면 윤 일병, 터지면 임 병장"이란 말이 크게 공감을 얻는 것은 군에 대한 불신 때문입니다. 사실 비극의 바탕에는 군 지휘부의 무능과 부패가 깔려있습니다. 당장은 힘들겠지만 대체복무제를 인정하고 모병제를 실시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신성한' 국방의 의무라고 하지만 강제 징집되어 아름다운 청년 시절을 상명하복해야 하는 폐쇄된 공간에서 지낸다는 것은 괴롭고 슬픈 일입니다. 신교대에서 훈련 받던 시절 아버지께서 일주일에 한 통씩 편지를 보내시던 기억이 납니다. 편지의 끝에 이렇게 쓰셨습니다. "아들아, 탈영할 생각은 말고 열심히 군 생활하거라" 아버지께서 그리 걱정하신 이유는 헌병대에서 근무를 하신 터라 '비극'을 아주 가까이서 자주 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거의 20년 전의 일이지만 군대 시절 기억은 어제 일인듯 생생합니다. 구타와 얼차려,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명령 같은 비릿한 맛이 나는 기억도 있지만, 꼭 나쁜 추억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믿거나 말거나 그 시절 후임병에게 한 번도 구타를 하거나 얼차려를 주거나 욕을 한 적이 없습니다. 

자대에 있을 때 윗 선임병에게 그런 대우를 받은 적이 없기 때문에 저도 그리 했던 것뿐입니다. 사수였던 강명표 병장님이 생각나는군요. 뺀질하고 비딱한 후임병을 이해하고 챙겨준 참 품이 너른 사람이었습니다. 무슨 일이든 솔선수범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살면서 다시 만나고 싶은 분입니다. 제대하고 여수에 있는 큰 회사에 취직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것이 마지막이니 아쉽습니다.

아까운 젊은이들이 더 이상 희생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박노해 시인의 <노동의 새벽>에 실린 시 '썩으러 가는 길-군대 가는 후배에게'를 옮깁니다. 시가 깁니다. 그래도 전문을 모두 옮기고 싶군요. 아버지 때나 박노해 시인이 이 시를 발표했던 1984년이나 제가 군 생활 했던 시절이나 지금이나 군대는 '썩으러 가는 길'일까요. 서로 상처따윈 주지 않고 참된 벗을 만나는 장이 되었으면 합니다. 건강한 모습으로 들어가서 진실한 청년으로 부모님 품으로 돌아올 수 있는 군으로 거듭나길 바랍니다.

'썩으러 가는길-군대 가는 후배에게'

열여섯 앳띤 얼굴로
공장문을 들어선 지 5년 세월을 
밤낮으로 기계에 매달려
잘 먹지도 잘 놀지도 남은 것 하나 없이
설운 기름밥에 몸부림하던 그대가
싸나이로 태어나서 이제 군대를 가는구나
한참 좋은 청춘을 썩으러 가는구나

굵은
 눈물 흘리며

떠나가는 그대에게
이 못난 선배는 줄 것이 없다
쓴 소주 이별잔밖에는 줄 것이 없다
하지만 철수야
그대는 썩으러 가는 것이 아니다
푸른 제복에 갇힌 3년 세월 어느 하루도
헛되이 버릴 수 없는 고귀한 삶이다

그대는 군에서도 열심히 살아라
행정반이나 편안한 보직을 탐내지 말고
동료들 속에서도 열외 치지 말아라
똑같이 군복 입고 똑같이 짬밥 먹고
똑같이 땀흘리는 군대생활 속에서도
많이 배우고 가진 놈들의 치사한 처세 앞에
오직 성실성과 부지런한 노동으로만 
당당하게 인정을 받아라

빗자루 한 번 더 들고
식기 한 개 더 닦고
작업할 땐 열심으로
까라면 까고 뽑으라면 뽑고
요령피우지 말고 적극적으로 살아라
고참들의 횡포나 윗동기의 한딱까리가
억울할지 몰라도

혼자서만 헛고생한다고 회의할지 몰라도
세월이 가면 그대도 고참이 되는 것,
차라리 저임금에 노동을 팔며
갈수록 늘어나는 잔업에 바둥치는 이놈의 사회보단
평등하게 돌고도는 군대생활이 
오히려 공평하고 깨끗하지 않으냐
그 속에서 비굴을 넘어선 인종을 배우고
공동을 위해 다 함께 땀흘리는 참된 노동을 배워라

몸으로 움직이는 실천적 사랑과
궂은 일 마다않는 희생정신으로
그대는 좋은 벗들을 찾고 만들어라
돈과 학벌과 빽줄로 판가름 나는 사회 속에서
똑같이 쓰라린 상처 입은 벗들끼리
오직 성실과 부지런한 노동만이
진실하고 소중한 가치임을 온몸으로 일깨워
끈끈한 협동 속에 하나가 되는 또다른 그대,
좋은 벗들을 얻어라

걸진 웃음 속에 모험과 호기를 펼치고
유격과 행군과 한딱가리 속에 깡다구를 기르고
명령의 진위를 분별하여 행하는 용기와
쫄다구를 감싸 주는 포용력을 넓혀라
시간 나면 읽고 생각하고 반성하며
열심히 학습하거라
달빛 쏟아지는 적막한 초소 아래서
분단의 비극을 깊이깊이 새기거라

그대는 울면서
군대 3년을 썩으러 가는구나
썩어 다시 꽃망울로 
돌아올 날까지
열심히 썩어라

이 못난 선배도 그대도 벗들도
눈부신 꽃망울로 피어나
온 세상을 환히 뒤흔들 때까지
우리 모두 함께
열심히 썩자

그리하여 달궈지고 다듬어진
틈실한 일꾼으로
노동과 실천과 협동성이
생활 속에 배인 좋은 벗들과 함께
빛나는 얼굴로
우리 품에 돌아오라

철수야 눈물을 닦아라
노동자의 끈질긴 생명력으로 
열심히 열심히
잘 썩어야 한다

[사진]은 몇 장 없는 군대 사진 중 하나입니다. 오른쪽에서 두 번째, 위장크림을 건성(?)으로 칠한 뺀질뺀질한 병사가 책방지기입니다. 그때는 참 장난기 많았는데요. 함께 찍은 벗들 이름이 이제 가물가물합니다. 강명표 병장님은 아쉽게도 사진에 없군요.



노동의 새벽

저자
박노해 지음
출판사
느린걸음 | 2004-11-12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위험한 시집의 탄생이 몰고 온 충격과 파장 1984년, 한 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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