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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193] 어제 옛 직장 선배님이 책방 살림에 보태라 500권이 넘는 책을 보내주셨습니다. 가득 채운 박스를 풀며 책을 책상 위에 쌓는데, 이렇게 책이 한꺼번에 많이 들어오는 날이면 정리하는데 한없이 시간이 걸립니다. 사실 책을 분류하는데 보다 어떤 책이 있나 살펴보는데 정신이 팔립니다.

책을 꺼내다 눈이 가는 책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그 책을 붙잡고 있느라 시간가는 줄 모릅니다. 좋은 책들이 많지만 그 중 3권에 꽂혔습니다. <이백오 상담소>,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 <대지>입니다.

<이백오 상담소>는 소복이님의 만화책입니다. 새만화책에서 펴냈죠. 한마디로 주옥같다고 해야겠습니다. 20~30대 여성 독자들(특히 싱글)이라면 작가가 풀어놓는 배꼽잡는 유머와 우울한 페이소스에 빠질 수밖에 없겠군요. 마스다 미리의 '수짱 시리즈'와는 또다른 느낌입니다. 마스다 미리의 작품은 말랑말랑하고 가벼운 일본 감성이 물씬한데, <이백오 상담소>는 훨씬 현실감이 큽니다. 우리네 만화라서 그렇겠죠. 강추합니다.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는 파블로 네루다가 19세에 펴낸 시집입니다. 국내에는 1989년 민음사에서 번역 출간되었습니다. 현재도 민음사에서 나오고 있는데 19세 때 이런 작품을 써서 시집으로 묶었다는 사실에 얼마나 놀랐던지요. 책방에 최근 나온 시집이 있었는데 팔려가고 이번에 선배님이 보낸 것은 초판본입니다. 

그런데 옛 책의 디자인이 고졸한 맛이 있어 살펴보니 정병규님이 책꼴을 만들었습니다. 그는 국내 '북 디자인' 분야에 큰 획을 그었고, 이바지한 바가 큽니다. 어느 잡지 인터뷰에서 밝혔던, 정병규님이 초기에 디자인했던 김소운 선생의 <토분수필> 초판본이나, 소설가 한수산님의 <부초> 초판본을 구할 수 있다면 상당한 가치가 있을 텐데요. 

한국출판문화공사에서 1983년 펴낸 <대지>는 소설가이자 심령가인 안동민 선생이 번역했습니다. 책 자체보다 안동민 선생이 펄 벅의 작품을 번역했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심령학에 관심이 없다면 그의 이름을 아는 분은 드물거라 생각합니다. 

이 책 표지를 보고 설마했었는데 검색을 해보니 이 책을 펴내기 전에 이미 펄 벅의 대표작을 뽑아 번역해 전집을 만들었던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안동민 선생이 펴낸 '펼 벅 전집'을 보고 싶군요.

이리저리 쌓인 책들을 훑어보고 있노라면 계속 생각이 가지를 칩니다. 일이 더딜 수밖에 없죠. 주말에는 어떻게든 최대한 자리를 마련해서 책을 꽂아야겠습니다.

파블로 네루다의 책에서 옮깁니다. 아무리 읽어봐도 열아홉 청년의 입에서 나온 시라는게 믿어지지 않는군요. '책에 부치는 노래 I' 일부입니다.

"
...
어떤 책도 나를
종이로 쌀 수 없었고,
인쇄로
나를 채울 수 없으며,
거룩한 간기刊記로도 채울 수 없고,
여태껏 내 눈을
덮지도 못했다,
나는 책에서 나와 과수원으로 살러 간다
내 목쉰 노래 일족一族과 함께,
달아오르는 금속 일을 하러 가고
산 속 난로가에서
훈제 쇠고기를 먹으러 간다.
나는 모험적인 책을 
좋아한다,
숲이나 눈雪에 대한 책
바다나 하늘
그러나
거미 책은 
싫어한다
생각이
해로운 철망을 쳐서
어리고
선회하는 비상에 올가미를 씌우는 그런 책
책이여, 나를 놓아다오.
나는 여러 권의 책으로
뒤덮히지 않으련다,
... 
"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

저자
파블로 네루다 지음
출판사
민음사 | 2007-01-30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시인의 나이 열아홉에 세상에 나와서 그의 이름을 남미 전역에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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