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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일지

[D+190] 기싱의 고백

sosobooks 2014. 5. 20. 20:27


[D+190] 이 책 참 좋은데, 새 책으로 아직 살 수 있을까 온라인 서점에 검색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새책이 저렴하면 굳이 헌책으로 사실 필요가 없다 알려드리기도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책 중에 <기싱의 고백>이 있습니다. 원제는 '헨리 라이크로프트 수상록', 혹은 '헨리 라이크로프트 수기'인데 효형출판에선 원 저자 조지 기싱의 이름을 그대로 가져와 제목을 붙였습니다. 책 속의 메모를 보니 제가 2001년 2월 10일 압구정동 글사랑문고에서 구입했군요. 검색 해보니 이 책은 절판이 되었습니다.

출판사에서 외국 저작물의 판권을 구입할 때 일반적으로 5년짜리 판권을 구입합니다. <기싱의 고백> 초판이 나온 것이 2000년 12월이니 다시 판권을 구입하지 않았다면 2005년쯤 절판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겠군요. 찾는 분들이 많아 판권 기한을 한 차례 연장했다고 해도 2010년이 될테니 서점에서 찾을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온라인 서점에 남아 있는 정가가 초판에 박힌 12,000원이 그대로인 것을 보면 판권을 연장하지 않은 듯 보입니다. 짐작이 맞다면 2005년쯤 절판이겠군요.

지금 이 책의 값은 정가보다 훨씬 뛰었습니다. 아마 알음알음 입소문이 나서 찾는 분들이 계셔서겠지요. 바라보고, 듣고, 느끼고, 읽고... 여기까진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문장으로 옮기는 일은 스스로 가다듬는 단계가 필요합니다. <기싱의 고백>은 '일상의 문장'을 어떻게 다듬을 수 있는지 잘 보여줍니다.

지식으로 쓴 글은 메마르고, 감성을 앞세운 글은 히마리가 부족합니다. 지식의 뽐냄과 감성의 들뜸을 절제하고 조화를 이뤄야만 좋은 에세이가 나올 수 있는데 제가 보기엔 <기싱의 고백>은 그 전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싱은 자신을 숨기고 '헨리 라이크로프트'라는 가공의 인물을 내세워 소설처럼 이 책을 썼지만 자신의 내면을 철저하게 헨리 라이크로프트에 이입해 1900년 무렵 산업혁명이 한창인 영국의 일상을 기록한 에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제가 이 책을 좋아하는 이유는 '글'과 '책'에 대한 에피소드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 가운데 몇 단락을 옮깁니다. <기싱의 고백>이 어디서든 다시 출간되었으면 좋겠군요. 

"모든 형태의 생존경쟁은 지긋지긋한 것이지만, 문필업이라는 투기장에서 벌어지는 난투극이야말로 내가 보기에 다른 어떤 경쟁보다도 더 추잡하고 타락적이다. 1천 단어에 얼마씩이라고 매겨지는 그대들의 원고료는 얼마나 보잘것없으며, 그대들이 써야 하는 교양적인 잡문들과 회견기사들은 또 얼마나 부질없는가! 게다가 그 투기장의 싸움에서 패하여 짓밟힌 자들에게는 얼마나 암담한 절망이 기다리고 있는가!" -89쪽

"우리가 아무리 오래 살아도 우리 지식은 늘 불완전할 것이고, 책장을 넘길 힘과 책 읽을 마음이 남아 있는 한 늘 우리 지식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215쪽

"등불을 끄고 문간에 이를 때면 나는 늘 돌아서서 뒤돌아보곤 한다. 꺼져가는 석탄 불빛에 비친 내 방이 너무 유혹적으로 아늑해서 나는 쉽게 문 밖으로 나갈 수가 없다. 따뜻한 불빛은 번쩍이는 목재, 의자, 책상, 책장, 그리고 호화장정본의 금박 제목에 반사된다. 그 빛이 이쪽에 걸린 그림을 비추는가 하면 저쪽에 걸린 그림에서는 어둠을 흩어놓는다. 

요정들이 등장하는 동화 속에서처럼 책들은 저희끼리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내가 방을 떠나주기를 기다리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시들어가는 석탄불에서 불꽃이 하나 날름거리며 솟는다. 그러자 천장과 벽에 그림자들이 어른거린다. 나는 흐뭇하기 그지 없는 마음으로 한숨을 쉬면서 밖으로 나가 조용히 문을 닫는다." -322쪽



기싱의 고백

저자
조지 기싱 지음
출판사
효형출판 | 2000-01-01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헨리 라이크로프트라는 가공의 인물을 통해 인간과 사회의 성찰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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