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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일지

[D+191] 책싸개

sosobooks 2014. 5. 21. 20:23



[D+191] 문고판을 좋아합니다. 이유를 들자면 가볍고, 값이 싸고, 손에 딱 잡히는 크기에다 책꽂이를 많이 차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특히 여행을 떠날 땐 문고판이 좋습니다. 저는 주로 범우사 문고판을 애독하는 편입니다. 작은 문고판이라 할지라도 여러 번 읽어도 그때마다 닿는 깊이가 다른 책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무소유>, <무서록>, <백설부> 같은 수필은 여행과 잘 어울립니다. <역사소품>이나 <아버지의 뒷모습>같은 중국작가의 에세이도 읽을 때마다 느끼는 바가 다릅니다. 

책방에 무시로 다닐 때 범우사 문고판이 보이면 중복되지 않는 이상 구입을 하곤 했습니다. 지금은 그때 거뒀던(?) 책들을 내어놓고 파는 처지가 되었군요. 범우문고 판형은 세로 170mm ,가로 110mm이고 200쪽 내외로 크기와 두께가 거의 일정해 자주 손에 잡히는 책은 책싸개를 하고, 다른 책을 가져갈 땐 책싸개를 재활용(?)하기도 하죠. 가방 속에서 뒹굴어도 책이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제가 봐도 유난스럽다는 생각도 드는군요.

책싸개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제가 가장 좋아하는 책싸개 종이는 맥도날드 프랜치프라이 봉투입니다. 얇지만 질겨서 책싸개 용으로 딱입니다. 요걸 시켜먹을 때 포장용지는 챙기는 버릇이 있습니다. 버리기 아까운 소포용 크라프트지도 책싸개하긴 좋습니다.

처음 책방을 열 때 책싸개 '유료' 서비스를 하면 어떨까 싶어 따로 용지를 만들까 고민도 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비용과 시간이더군요. 대량으로 책싸개 용지를 디자인해서 만들려면 꽤 비용이 들고, 과연 헌책을 사가시는데 책싸개를 하실 분이 있을까 그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예전엔 책을 사면 책싸개를 기본으로 해주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만큼 책을 소중하게 여긴 증거겠지요. 

누군가에게 책은 쓸모없는 물건일수도 있고, 아주 소중한 보물일수도 있습니다. 책의 가치는 사람마다 다르겠지요. 가치가 다른 만큼 책이 모든 것을 알려주진 않습니다. 단지 읽는 것만으론 부족합니다. 책에 파묻혀 살아도 늘어가는 것이 지식 뿐이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오히려 책보다 길에서 얻는 산 지식이 삶을 더 풍요롭게 한다 생각합니다. 책은 디딤돌일 뿐입니다. 결국 스스로 생각하고 몸을 움직여야 제대로 읽은 거겠죠.

법정스님께서 "그동안 풀어놓은 말빚을 다음 생으로 가져가지 않겠다. ... 내 이름으로 출판한 모든 출판물을 더 이상 출간하지 말라"고 하신 뜻도 '글에만 매달리지 말라'는 의미가 아닐까요. <무소유>엔 법정스님께서 책을 부엌 아궁이에 집어넣고 태운 일화가 나옵니다.

"하루는 장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소설을 한 권 사왔었다. 호손의 <주홍글씨>라고 기억된다. 아홉 시 넘어 취침시간에 지대방(고방)에 들어가 호롱불을 켜놓고 책장을 펼쳤다. 출가한 후 불경 이외의 책이라고는 전혀 접할 기회가 없던 참이라 그때의 그 책은 생생하게 흡수되었다. 한참을 정신없이 읽는데 방문이 열렸다. 선사는 읽고 있던 책을 보시더니 단박 태워버리라는 것이다. 그런 걸 보면 '출가出家'가 안 된다고 했다. '불연세속不戀世俗'을 출가라고 하니까.

그 길로 부엌에 나가 태워버렸다. 최초의 분서焚書'였다. 그때는 죄스럽고 좀 아깝다는 생각이었지만, 며칠 뒤에야 책의 한계 같은 걸 터득할 수 있었다. 사실 책이란 한낱 지식의 매개체에 불과한 것, 거기에서 얻은 것은 하나의 분별이다. 그 분별이 무분별의 지혜로 심화되려면 자기응시의 여과 과정이 있어야 할 것이다."

결국 책은 "한낱 지식의 매개체"일 뿐이라는 깨달음을 얻기까지 스님은 집에 두고온 책에 대한 번뇌에 사로잡혀 있었다 하셨습니다. 집착을 버리는 순간 깨달음은 오는 걸까요. 스님의 말씀을 머리에는 새겼지만 몸과 마음으론 실행에 옮기질 못하겠습니다. 그 순간이 온다면 책방지기 일도 딱 그만두고 먼 여행을 떠날 수도 있을텐데요.

아마 법정스님께서 그런 유언을 남기신 것은 스승이었던 효봉스님의 마지막 가르침도 깊은 영향이 있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법정스님이 효봉스님의 말씀을 엮어 출간한 <달이 일천강에 비치리>에는 효봉스님께서 입적하시기 전 임종게가 실려있습니다.

"(효봉스님이) 입적하기 며칠 전 곁에서 시동들이 청을 드렸다. 
"스님 마지막으로 한 말씀 안 남기시렵니까?” 
"나는 그런 군더더기 소리 안할란다. 지금껏 한 말들도 다 그런 소린데...”하며 어린애처럼 티없이 웃었다. 
그리고 이렇게 읊었다. 

내가 말한 모든 법 吾說一切法 
그거 다 군더더기 都是早騈拇 
오늘 일을 묻는가 若問今日事 
달이 일천강에 비치리 月印於千江"

"말빚 다음 생으로 가져가지 않겠다" 남기신 말씀의 참뜻을 저는 <무소유>에 실린 이 시를 읽고 느낀 바가 있습니다. 원문은 금강경에서 온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환하게 밝힐 수 있는 책 한 권 마음 속에 지니고 있으니 종이책에 구태여 얽매일 필요는 없습니다. 마음 속 경전을 밝히는 것도 힘써야겠지만 당장 책싸개를 포기하긴 힘들겠군요. 알지만 행하기 어려운 것이 세상엔 얼마나 많은지요.

"사람마다 한 권의 경전이 있는데 我有一卷經
그것은 종이나 활자로 된 게 아니다 不因紙墨成
펼쳐보아도 한 글자 없지만 展開無一字
항상 환한 빛을 발하고 있네 常放大光明"



무소유

저자
법정 지음
출판사
범우사 | 1999-08-05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인생의 참 진리를 전하는 법정 스님의 대표작! 지나치게 소유에...
가격비교



달이 일천강에 비치리(불일소책 1)

저자
법정 지음
출판사
불일출판사 | 1984-12-01 출간
카테고리
종교
책소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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